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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봄 비>

이 비 그치면/내 마음 江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맑은 하늘에/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향연(香煙)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 시는 이수복(李壽福: 1924-1986)의 〈봄비〉이다. 함평읍 장교리 산음마을 출신인 시인은 1954년 「문예」3월호에 〈동백꽃〉, 1955년 「현대문학」3월호와 6월호에 〈실솔蟋蟀〉과 〈봄비〉등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서정주가 추천한 위 세편에 대해 시인 자신도 대표작으로 자부했음은 「봄비」라는 시집의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1968년조연현(趙演鉉) 교수의 서문을 달고 세상에 나온 그의 처녀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봄비」는 모두 34편의 주옥 같은 남도 서정의 면면을 풍성하게 담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실솔(귀뚜라미-인용자 주), 〈무등부〉〈무덤과 나비〉〈꽃상여 엮는 밤〉〈모란송〉(Ⅰ·Ⅱ), 〈소곡〉 등으로 50년대 주목을 받았던 시인, 그는 1957년 제3회 현대문학 신인상, 전라남도 문화상등을 수상했는데 그 공로는 다름 아닌 김소월 등을 잇는 전통적 서정의 시를 쓰면서도 그 나름의 독창적 시 세계를 개척했다는 평이었다.

또한 그만의 독창적 시 세계란 바로 향토성 짙은 시어에 남도의 멋진 가락을 실어 시적 형상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호남 시단은 물론 한국시단을 풍요롭게 가꾸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위의 시비는 시인의 고향인 함평읍내 수변 공원 등지에 세워져 있는데 해마다 봄이 오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래저래 흔들면서 짙은 싱그러움으로 영원히 살고 있다.

◆이 비 그치면 연둣빛 별빛이 녹음되것다

봄의 끄트머리에 서면 여름신 염제(炎帝)의 기승은 불같이 거세게 대지를 달군다. 그 열정은 지방자치 단체장을 필두로한 지역민들의 고향 사랑만큼 뜨겁다. 꽃으로 시작된 세상과의 인연을 과일이라는 성불(成佛)의 결실로 맺기 위한 태양의 열정은 단말마적 함성되어 귓전에 윙윙거린다.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 갈제/ 흥양(興陽-고흥:인용자)의 돋는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의 아침 안개 영암(靈岩)을 둘러있네/’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단가의 하나인<호남가湖南歌> 첫들머리다. 위에 나오는 ‘함평천지’를 ‘전남 함평군’으로 보는 견해와 ‘무사태평’ 또는 ‘태평성대’의 의미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함평군이라는 전라남도에 있는 지명으로 이해하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어쨌든 함평(咸平)은 ‘모든 것이 다 고르다’는 원만구족(圓滿俱足)의 의미여서 듣기만 해도 평화와 자비가 넘쳐나며 즐겁고 행복한 상상이 절로 연상되는 말이 아닐는지... 최근엔 나비축제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함평, 조선 후기 때 관찰사 이서구(李書九)가 호남 56개 (혹은 57개) 고을의 산수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충효와 선행의 진작을 위하여 만들었다는〈호남가〉, 여기에 송정리 출신 국창 임방울이 곡을 붙여 애창했던 덕분에 익히 잘 알려진 고장이다. 함평은 이수복 시인 외에도 80년대 이후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통하는 박노해(본명 박기평)의 고향이면서, ‘겨울공화국’ 시인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낸 양성우의 탯자리 이기도 하다. 이수복은 서울대 문리대 재학 중 광주에서 한국 전쟁을 맞는데 그때 무등산 기슭에서 우거 중이던 미당 서정주와 만난다.

그 인연으로 전쟁이 끝나자 조선대 국문과에 편입한 이수복은 졸업 후 수피아 여고 등 여러 고등학교에서 우리 말글로 수놓아진 우리 어문학을 가르쳤는데 승주 주암고에서 수업 도중에 쓰러져 순직했다.(62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봄비’로 만났던 이수복 시인, 그는 봄비처럼 우리 곁에 다가와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 시만을 썼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는, 이른바 영락없는 토종의 한국 정서를 살뜰히 빚어낸 서정시인이다. ‘한국적 정서’라 했거니와 그것은 모든 시인들의 화두이기도한 이별, 한, 고향, 상여 등의 제재와 더불어 우리말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원망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로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봄비>의 첫 연이다. 시를 자주 읽는 사람이거나 시 창작에 관심이 있다면 얼른 떠오르는 시구가 있을 게다. 다름 아닌 고려 때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에 나오는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가 그것이다. ‘이 봄비 그치면 긴 둑방에 푸른빛이 짙어 오리니’로 풀이되는 첫 구와 그 다음 구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임을 보내는 남포에선 서러운 울음소리 울려 퍼지리’를 비교해보자.

이수복 시인의 〈봄비〉는 정지상의 〈송인〉이라는 시 1· 2구에서 시상을 얻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그러면서도 정지상이 이별의 서러움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이시인은 봄날이 가져다 줄 종달새의 맑은 소리, 처녀들의 밝은 모습, 그리고 희망처럼 솟아오르는 아지랑이를 상상하고 있음이 비교된다. 꽁꽁 얼어붙은 싸늘한 동토의 어둠이 물러선 자리, 꼼질꼼질 손짓하며 쭈뼛쭈뼛 고개들고 세상 구경 나서는 여리디 여린 초록이었건만, 우후청(雨後晴)이라는 말처럼 봄비 한 줄금에 머리 감은 뒤 하늘이 개이고 나면 어느새 여림은 사라지고 언제 그랬느냐 듯 성큼 성장한 짙은 풀빛이 그 자리를 메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 뭐 별 것인가? 녹음이라 해봤자 곧 시들어 바람에 날려 사라질 것들 아니던가! 그러나 시인은 일장춘경(一場春景) 다름 아닌, 한바탕의 봄 경치를 덧없이 흐르는 비애로 보기 보다는 연둣빛 별빛 같은 봄비 후의 맑고 깨끗한 서경의 세계를 한 폭의 수채화로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별이나 슬픔의 격렬한 감정적 표현이 아닌 친근하고 다정한 감성으로 일상적인 마음 속 고향 마을에서 만났던 봄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수복 시인은 늘 숨어사는 별처럼 겸손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생애 단 한 권의 시집만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도 내놓으면서 “차림새에 있어 Ⅰ에서Ⅶ까지로 나누어 차려 놓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무슨 그럴듯한 까닭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내 시들이 변화가 없이 너무 단조롭기만 한 것을 이렇게라도 위장시켜 볼까한 심산에서 그래 본 것이다”라고 하여 시집을 내는 일에 잔득 미안해하는 심사를 고백했는데 이는 시인의 겸손한 심성을 대변하는 웅변으로 이해할 부분이다.

시인은 서정주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고 했거니와 두 사람이 만났던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무등부 無等賦〉가 주목된다. 원래 부(賦)라는 형식은 산문적 성격에 운문적 형식으로 마음속에 쌓아둔 회포를 드러내기에 편리한 갈래로서 그 역사는 한문학에서 유래한다.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襤褸)에 지내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 같은 /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로 시작되는데 이수복의 〈무등부〉는 위시의 속편으로 불리울 만큼 연계의 긴밀도가 높다. 곧 제2연 '가리고 가리우는 참 많은 산등을/ 너그러이 굽어보는/ 맑은 이마를...’/ 에 이르면 ‘가리우는’ 것과의 관계 설정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등을 보며〉에 나오는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의 부분에서 첫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자기의 시 속에서 찬송하고 있음은 그의 서정주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이수복의 시들은 천진하면서 균제된 서정이 샘솟는데 가령 ‘/손금 골진 데 꽃씨를 놓으니/ 문득/ 닝닝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 다순 해/나래를 접고/향(香)내 번져 꿈처럼 윤흐르는 밤.../’을 보자.

〈꽃씨〉3연과 4연인데 손바닥에 패인 손금에다 꽃씨를 놓으니-마치 소녀처럼 천진한 모습이다- 문득 윙윙거리며 꿀벌들이 찾아온다는 말로 시작했다. 자못 요란스럽고 화들짝 놀래키울 만한 장면의 설정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의외로 ‘다순 해’ 곧 따스한 햇님이 날개를 접은 밤이 되니 꽃향기가 번져서 꿈을 꾸는 듯 윤기가 흐르는 밤이라는 매우 절제된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작 태도는 조연현이 말한 바와 같이 ‘안방’에 숨은 새댁같은 모습이며, 늘 숨어사는 별처럼 겸손한 정신의 능력이 빚어낸 주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향토성이 물씬한 시편은 다음과 같은 〈동백꽃〉등에서 맛볼 수 있다. ‘동백꽃은/훗시집간 순아누님이/매양 보며 울던 꽃// 눈녹은 양지쪽에 피어/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 홍치마에 지던/ 하늘 비친 눈물도 가녈피고 씁쓸하던 누님의 한숨도/ 오늘토록 나는 몰라.../’ 서정주의 서정은 질펀한, 그러면서도 약간 목이 쉰듯한 판소리 같은 맛깔이라면, 이수복의 그것은 다소곳한, 그러면서도 애잔한 맛이 나는 새댁이 부르는 사향 노래같은 맛깔이라고 말해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성 싶다. 그의 또 다른 업적으로 평가되는 한국적인 정감을 보여준 면모는 〈꽃상여 엮는 밤〉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인경을 걸어매고 슬픔에 영롱한 야삼경/ 골짜기에서는 쑤꾸기가 울어/ 베옷입고 숨어 울어// 두메마을 뉘집 문전에는/ 내어걸린 초롱불빛이/ 흐부여히 물살을 일고/‘에서 보듯 이수복 시인의 서정은 전통적인 정서에서 솎은 것으로 그 세계는 부드럽고 아늑한 율조로 윤기를 보탰다. 또한 마음에서 물결치는 격랑의 파도는 절제의 미학으로 제어를 했다.

뻐꾸기(쑤꾸기)처럼 숨어 울었던, 그것도 애처롭고 슬피 울었던 시인, 우리 말글을 사명처럼 사랑한 사람, 별을 닮아 늘 외롭게 깜박이다 끝내 하늘로 외롭게 돌아간 넋이라니... 이 비 그치면 초록이 늙어 단풍질날이 멀지 않으리니, 교단에서 가르치면서 한데 눈 팔지 않고 제단으로 돌아 앉은 숭고한 사표를 기릴 날 많고 또 많으리라! 봄의 끝자락에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구걸하다가 한 자리 차지하면 그것도 힘이요 세력이라고 깝치는 꼬락서니를 본다. 아, 못내 가멸스러워, 돌아누우니 봄비처럼 다수운 님의 생각 눈앞에 끈합니다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