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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엽 경양방죽을 최종적으로 매립할 때 필요한 흙을 얻기 위해 태봉산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양방죽이 그 이전인 30년대 말엽에 처음 매립될 때, 역시 매립에 필요한 토사를 확보하느라 야산 하나가 깎여 나간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사라진 산이 지금 계림초등학교와 광주고등학교가 들어선 경호대(鏡湖臺)란 곳이다.

이곳은 원래 해발 90m가 넘는 산이었던 것 같다. 동쪽으로 놓인 무등산에서 발원한 높다란 산등성이들에 비하면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했지만, 가까운 주변이 온통 광활한 들판이라서 그 아래에 서면 제법 높다랗게 느껴졌음직하다.

특히 울창한 숲에 에워싸인 경양방죽의 연꽃을 굽어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라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경호대라 이름 붙이고, 그 한쪽엔 ‘경호정’이란 정자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호대는 또 여제단이 있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제단이란 역병이나 전란, 호환 등으로 죽어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시설이었다. 예전엔 잦은 역병의 원인이 이런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며 내리는 저주 탓이라고 믿어 그들만을 위한 별도의 시설을 마련했고, 관아에서 직접 나설 만큼 이곳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꽤나 중시했다.

또 여제단은 잡귀들이 드나들만한 곳을 골라잡아 세우곤 했다. 실제 광주의 안위를 기원할 요량으로 세운 성황당(성황사라고도 했다)을 남문 밖 학동에 두었던 것처럼, 경호대의 여제단도 사실은 이곳이 동문을 통해 담양 방면으로 나가는 길가였던 까닭에 세웠던 것이다.

그 무렵 광주 시내에서 담양읍내 쪽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는데, 그 하나는 경호대에서 조금 떨어진 방죽의 ‘제방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옛 계림동 시청사 옆길에 해당하는데, 원래 사방이 툭 터진 길이었으나 70년대 이후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 탓에 좁고 답답함을 주는 골목길로 변했다.

그래도 1770년대 다산 정약용이 지은 시에서 이 길을 일러 ‘관로(官路)’라 한 걸 보면, 광주와 담양 사이의 간선도로쯤으로 인식됐고 주로 사대부나 관원들이 이용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정약용보다 100여 년 뒤 여수와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도 이 길을 가로질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에 비춰 20세기 이전에 관아에서는 이 길을 광주에서 담양·순창·남원 등을 거쳐 전주 감영으로 이어지는 가장 핵심적인 교통로로 여겼던 것 같다.

이에 견줘 관로와 달리 서민들이 즐겨 이용했던 길이 바로 경호대 아래의 여제단 앞길이었다. 지금 광주~담양을 잇는 동문로가 그 길에 해당한다. 동문로는 동문 밖의 계림오거리에서 광주고 앞을 지나 서방사거리와 말바우시장을 거쳐 담양으로 빠져 나간다. 이 길은 주로 동문 일대의 사람들이 금남공 정충신 장군의 고향인 향동(鄕洞, 지금의 풍향동)을 거쳐 담양 쪽으로 갈 때 거쳐 갔다.

물론 무등산과 바로 인접해 있었던 탓에 산에서 내려오는 맹수들로 인한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한때 풍향동에 있던 광주향교를 시내 쪽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관로인 제방길은 권마성을 내지르며 가는 사대부나 관원들의 행렬이 많고, 일반 서민들이 그들과 맞닥뜨려 자칫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은 주로 이 경호대 앞길을 이용했다. 즉, 그들에게 더 속편하고 붙임이 가는 길이었던 셈이다.

또 이 경호대 앞길은 문화동이나 두암동 뒤쪽의 산자락과도 이어져 있어 시내 사람들이 매일 땔나무를 베어 나를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 이 길 주변엔 ‘나무꾼들의 길’이라 일컬을만한 산길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이 산길들은 두암동과 풍향동처럼 행정동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물론 경호대 앞길에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여름철 폭우라도 쏟아지면 길이 무척이나 질퍽거려 20세기 초엽까지도 통행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 광주 관아에서는 노면이 더 단단한 제방길을 관로로 삼았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일제 때 경호대 앞길이 신작로로 바뀌고 60~70년대엔 양림동에서 출발한 2번 시내버스가 이 길을 따라 서방사거리 혹은 말바우 사거리까지 운행하면서 옛 제방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쓰임새가 많아졌다. 이렇게 되면서 지금처럼 광주시내에서 담양으로 가는 대표적인 길로 굳어졌다.

물론 지금 경호대는 그 이름조차 낯선 곳이 됐다. 경양방죽과 함께 여태껏 남아 있었더라면 광주를 광주답게 했을 많은 문화경관 중 하나였을 테지만, 다른 많은 아쉬운 것들과 함께 기억의 후미진 뒤안길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광주고 앞길을 지나다 이 곳에 한때 헌책방들 말고도 꽤 풍치 좋은 산과 정자 그리고 시름을 달래주던 제사 터가 있다고 생각하면 낙담 속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정말 낙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인 까닭이다.

조광철 <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