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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향기가 준동하는 봄날 아침, 무럭무럭 짙어가는 초록을 보면서 농농하게 익어가는 봄을 읽는다. 어쩜 저리 상하 다름없이 고르게 봄날을 나눠줄 수 있을까? 봄의 화신은 참으로 공평한가 보다. 혼자 중얼거리며 자연의 불변함과 키움의 정신에 그만 머리 숙인다. 메말라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은 가난한 대지, 텅 비어 거북 등처럼 갈라진 안쓰러운 무논 등에서 불안과 걱정을 떨칠 수 없었는데, 요 이틀 내린 빗줄기에서 그만 안도의 노래가 절로 터진다. 고작 이틀의 축복인데도….

이제 농부는 못자리할 논에 물을 가두며 가을의 풍년을 꿈 꿀 것이고, 아이들은 운동회를 하면서 공활한 창공에 희망을 수놓을 것이다. 그렇게 봄은 익어가고 우리는 빈자리가 되며 역사가 영글어 진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언제나 시공은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키움에 충실하고 있는데 우리가 편의적으로 시공을 나누어 현재니 과거니 하면서 호들갑떠는 것이라 여겨왔다.

그래서 봄이면 키움과 자람이 떠오른다. 모두 자연의 몫만은 아니런마는 언제부턴가 키움이란 말뜻이 너무 왜소해 진 것은 아닌가 하여 씁쓸하기가 만만하다. 봄물이 사방 논에 넘실넘실 춤을 추고, 봄꽃 황홀하게 여름을 부르는 자연의 키움 앞에, 나는 지금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우리 이웃들은 어떻게 얼마큼 자라고 있는지, 생각조차 가난한 현실 앞이라 그만 춘곤증에 휘둘리고 만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기차란 것을 보았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이 생겨 달라진 물길이지만, 당시는 영암 용당리에서 철선에 차를 싣고 목포를 가곤 하던 때였다. 전깃불에도 아직 익숙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상당한 문화 충격을 받았다.

그 가운데 가장 신기했던 것이 기차와 계란 후라이였다. 목포제일중학교와 강진 칠량중학교와의 자매결연으로 초대받아 갔던 목포라는 도회지의 모습, 아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당시 내가 느꼈던 도회지 정서는 나이 쉰이 넘은 지금까지 늘 어떤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당시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터인데도 그런 행사를 추진하신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여행은 백과사전이요, 교과서며 훌륭한 선생님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공감을 한다.

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어느 날, 아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운동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동회라, 그래 청색과 백색의 머리띠를 동여매고 뭐 그리 신이 났는지, 하늘 아래 우리만 있는 냥 소리소리 지르며 좋아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때묻은 코흘리개 얼굴에서도 희망은 컸고, 초라한 옷차림일망정 초롱한 눈매 데리고 야무진 꿈은 꾸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 우리가 지금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 내 눈 아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너무 얕잡아 보는 것, 바로 이 오만함이 봄날의 희망을 꺾고 있음이리라.

도회지에서 수십 아니 수백 리 비포장 길을 마다 않고 덜컹덜컹 오셨던 선생님들, 당신들은 문화의 전령사였고, 땟 자국 속에서, 눈높이 아래서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신 위대한 발견가 였습니다.

오십년 전 시골의 모습이라니,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했을까마는 그러나 선생님, 당신들이 발견하신, 아니 당신들께서 키우신 희망의 씨앗들이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세우고 지켜는 희망의 돛대들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소수가 눈 아래 펼쳐있는 희망을 보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봄의 침묵을 강요한달 지라도, 그래도 어차피 봄은 늘 우리 안에 있어 때가 되면 희망의 꽃을 틔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지요?

봄날이 농농하게 익어가는 오늘, 선생님 생각이 눈에 삼삼 그리움을 키우고 저를 다잡아 세웁니다. 선생님, 이제는 저희들이 당신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하여 익어 가는 봄날이 여름의 오곡백과를 영글게 하듯, 눈높이 아래 펼쳐 있는 무한한 미래와 희망의 큰 싹을 발견하고, 또 잘 키워서 내 이웃 내 나라, 아니 온 세상 비추는 광명화가 되도록 주춧돌 단단히 놓으렵니다. 익어 가는 봄 마냥 선생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 하옵니다.

최한선 <전남도립대학 교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