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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적부터 황톳길 이슥한 왕복 사십 리 학교길을 걸으면서 본격적인 내 삶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 이전엔 산 너머 혹은 바다 건너에 누가 사는지 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미지에 대한 궁금투성이었다.

물론 한해 전 다섯 살 때 동네형을 따라 이십 리도 더 되는 면소재지에 갔다가 어찌어찌 혼자 되어 산길 들길을 헤매다 해거름에 집에 돌아온 적도 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길이 즐거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통방통할 일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늘 책보를 등에 질끈 동여매고 마라톤 선수처럼 등하교 길을 달리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학교운동회 때는 가장 먼 길을 오가는 우리 동네 달리기가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달려본 기억이 없다. 일등을 해 본 적도 없다. 날씨가 덥다든가, 춥다든가, 날이 어둡다든가 나와는 별무관계였다. 산천경개 모두 눈으로 어루만지고 보리피리 꺾어 불며 그 팍팍한 60년대 고갯길을 혼자서 천천히, 그러나 힘들지 않게 넘어온 것이다.

한 번은 오후반 친구들과 학교를 가다가 친구들이 달음질하는 통에 뒤에 처졌는데 앞서가던 친구들이 으레 느림보로 오는 나를 기다리기 위해 보리밭에서 잠이 들었다가 잠에 깨어 학교에 도착해 보니 벌써 내가 와 있더라는 것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의 경주 같은 이야기이다. 이처럼 유년기에서부터 비록 빠르지는 않지만 열심히 내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그 유년기의 끝무렵 십수 년을 혼자 살아온 할머니는 마을 골목에 숨어 동네 앞에서 서성거리다 산으로 가는 상여를 눈물로 훔쳐보곤 하였다. 어린 마음에 그 때 그 할머니의 속울음을 짐작해 보곤 하며 삶의 시작과 끝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그때 골똘하던 죽음과 생명의 문제는 지금껏 나를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2,3년 후 조용히 산으로 간 할머니는 한동안 나의 생각의 중심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뒷산 무덤까지의 거리는 불과 몇 마장이지만 마을에서 산으로 이르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온갖 즐거움과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길이라는 것을 차차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종가의 종손인 나를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선산에 데리고 다녔다. 종손의 길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풀 우거진 선산을 헤치며 무덤을 찾아 아버지는 일일이 "○○대조 할아버지"니 하면서 그분들이 살아온 길을 얘기해 주곤 하였다. 내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산에서 밤이나 감 따는 게 더 재미있었다. 점점 자라면서 선산에 다녀올 때마다 가문의 음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수많은 무덤들을 대할 때마다 망자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해 보곤 하였다. 또한 인간이 걷는 길에 대해 문득문득 사색에 빠지곤 하였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산을 내려와 들판을 지나 절벽 끝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 다시 바다에서 배가 끌고 가는 길, 활주로 끝에서 하늘로 이어진 길, 그리하여 길을 끌고 가는 비행기-하늘에도 바다에도 길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에서 생기는 일도 많다. 철도가 끊기고, 다리가 끊기고, 비행기가 추락해 길을 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장부의 길, 아내의 길, 남편의 길, 부모의 길, 자식의 길, 군인의 길……. 등 제각기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알맞은 길이 주어져 있다.

때로 그 길은 소풍길처럼 즐겁기도 하지만 예수나 석가가 걸었던 쉽지 않은 길도 있다. 그 옛날 우리 여인네들은 가슴에 은장도를 숨기고 제 길을 지키기도 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결코 한 길만을 걸어가기가 쉽지 않다. 장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외길 인생도 있지만 늘 두 갈래 혹은 세 갈래 길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길을 가게 마련이다. 후회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오늘도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이다. 조상대대로 이어진 그리하여 자자손손 이어질 길, 그 길 한 복판에서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인 것이다.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길을 내며 제트기처럼 길을 끌고 가는 삶의 버거움도 있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가 가르쳐준 길을 좇아가기도 했지만 성장하여 제 길을 가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도 있지만 보람과 즐거움으로 내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꾸만 길을 벗어나려 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내가 살아온 길을 따라 그들의 길을 내고 스스로 길을 가게 한다.

길은 결코 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산을 비켜간다든가 강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이 길이다. 산이 끝나면 끝나는대로, 바다에 와서 길이 뚝 끊어지더라도 길은 세상 끝까지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이어져 뜨거운 피가 돌듯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길은 우주에도 있다. 별들은 제 코스를 찾아 무한의 우주공간을 끊임없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 길을 가는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어 겨울이 오는 것도 자연법칙의 예정된 길이며 진리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이 엄정한 길의 순리를 거역할 수 없다. 습자지보다 더 얇은 날개에 삶의 무게를 싣고 가는 하찮은 고추잠자리도 제 길을 걷기 위해 하늘을 나는 것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계간《시와사람》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