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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어느덧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맞는다. 일러 유구한 역사라고 입을 모으는 아, 너와 나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 딸이어라. 역사의 굽이마다 문화는 찬란한 상처로 우리를 보듬었고 그 상처 어루만지며 삶의 의의를 다지고 다지며 한 세월 살아온 너와 나 우리는 이른바 민초 아닌가? 민초는 하찮은 바람에 흔들린 듯 보여도 어디 그 뿌리야 끄떡이나 하겠으며 그 정신의 명징함이야 빙옥보다 덜함이 있었던가? 불의를 보면 차마 그냥 보지 못하고 의를 위해 비장한 결단을 마다않았던 그대 빛나는 영혼의 민초들이여.

어찌 한 강산이 채 바뀌기도 전에 이래저래 가슴 칠 사연이 많고도 많은지. 하지만 모든 것 다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것, 그래도 살아온 날 생각하며 희망 끈 놓지 말기를…. 어떻게 지켜온 조국이며 어떻게 지켜가야 할 조국인데 우리가 가벼이 세월을 허송할 수 있으랴.

며칠 전 광양에 갔었다. 광양은 빛 광, 볕 양이니 두 개의 태양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잖은가? 고려의 대 문호 김황원 선생을 비롯하여 ‘호남 3절’로 칭송받은 조선의 최산두, 그리고 한말의 항일 운동가요 사상가며 역사가이자 대문호인 황현 등 태양처럼 빛나는 인물이 즐비한 고장이다. 그래 역시 인물은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법이렸다.

다소 들뜬 맘으로 찾아간 황현 선생의 사당과 생가, 어찌 두 건물을 저리 따로 지어두고 관리를 방치하고 있는지, 속된 말로 친일을 하면 자자손손 흥하고, 애국을 하면 자자손손 망한다는 말이 불현듯 뇌를 스치는 이유는 또 뭐람, 15~6세기 찬란하게 빛났던 호남의 시단과 문단이 19세기까지 그래도 그 자존의 불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단연 황현 선생의 공이요, 민중의 다사로운 시선으로 당대를 직시하고 미래를 열도록 지침을 마련한 역사의 증인이 바로 황매천 선생이며, 의연한 정신으로 내 몸을 던져 구국의 화신이 되신 분이 황선생 아니던가?

아니다. 황 선생은 이렇게 몇 마디 혀끝으로 형용할 어른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럴 생각으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저 눈부시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옥룡사는 말은 없고, 동백숲만 바람에 뭐라고 허공 향해 되뇌인다. 다른 시·군은 유명한 사찰이 없어 갖은 수단으로 옛 절터를 찾아 그 중창에 열심이라는데 왜 광양은 그 이름 값을 소홀히 하는지 우선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문제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래, 우리 천만 물러나 달리 생각할 겨를이 있겠지만, 광양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러하질 못하다. 물가는 치솟고 가치관은 혼재되어 물질의 폐해가 언어의 형언을 넘어선 지 오래이다. 애국이 뭐고 전통이 어떤 것이며 문화가 왜 소중한 지, 이번 광양을 답사하면서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어찌 할 일이 없겠으며 하늘이 사람을 낼 제 어찌 허투로 장난삼아 내었겠는가? 모두 뜻이 있어 내었으리라. 그렇다. 분명 뜻하심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거룩하게 온 것이리라. 앞서 말했듯이 역사의 굽이마다 문화를 낳고 그 문화의 깊이로 새로운 창조를 일삼으며 반만년을 살아 왔잖은가? 이제 다시 수없는 반만년을 살아갈 우리 후손들, 우리가 그들에게 이 모양 이 꼴로 무슨 유산이라고 부정과 몰 문화, 부조화, 불법, 편법, 위법 등을 물려줄 수 있겠는가? 두 개의 태양, 광양이여, 그대 제철로 하나의 태양 몫을 하려는가? 우리 그대를 열심히 응원하리라.

그리고 또 다른 태양은 무엇으로 만드려는지? 그대 빛나는 문화유산 그것을 태양으로 키우시게나. 이제라도 우리 모두 가슴에 은장도 하나 고이 품고 이 역경, 이 막힘, 이 어려움 의연하게 극복하는 정신 가다듬기를… 은장도, 그 우아한 기품 속에 예리한 칼날의 정신이 있고, 은장도, 그 아름다운 자태에 우리 삶의 좌표가 있으며 은장도, 저 작은 몸짓에 위대하고 거대한 삶의 미학이 있구나.

이제 우리 광양부터 은장도 다시 가슴에 품어, 나부터 바로잡는 주춧돌 되기 바란다. 칼이 어찌 칼만 되겠는가? 칼이 정신이요, 칼이 자존이며, 칼이 역사인 것을….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