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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 홍엽이 추흥객(秋興客)의 발길을 잡아끄는 이른바 낭만의 계절이다. 가을은 어쩜 인생을 살찌우는, 그래서 속이 좀 깊어지게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으로 수놓아진 단풍을 보노라면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일지라도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소 야산마저 찾기 힘든 바쁜 일상의 사람들에게 가을이 주는 오광십색(五光十色)의 향연은 그래, 우리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숨통을 틔우며 막힌 체증을 털어내게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한편 저리 아름답고 화려한 잎들이 날이 다르고 조석이 멀다 하게 나무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 흥진비래란 말이 있듯이 인생사 어디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있는가?

그래도 나뭇잎은 떨어져 다시 제 어미 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제 어미 겨울나기를 도와주지만, 인생이사 한 번 가면 머무는 곳 어딘 지 그 누가 알기나 하는가. 참 허무하고 쓸쓸한 생각이 물밀듯 밀려온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몇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형색색의 단풍이 무얼 닮아 저리 각양각색일까, 하는 것과 제아무리 단풍이 요란해도 제 푸른 절개를 변치 아니한 송백(松柏)이 있다는 것이다.

색색의 단풍이 누구를 닮았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공자와 석가 그리고 예수 등 성인을 연상하게 된다. 성인이라 했거니와 그들은 도대체 누굴 닮았을까? 봄이면 매미 날개 같은 의상을 한 상큼 발랄한 아가씨 모습에서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초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아직 첫 손님도 맞지 못한 채 거뭇거뭇 어둠을 맞는 등 굽은 노점상, 술에 찌든 직장인, 스트레스에 시달린 말단 직원, 말짱 꽝인 인생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저 각양각색의 삶 모습이 바로 성인의 본 모습 아닐까? 그래 아마 성인은 숱한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씩 갖다 닮은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저리 불타는 듯 곱단한 붉 단풍이 사람을 닮아서 그러리라는 생각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사람들이 단풍을 보고 입을 벌려 탄성을 지르며 정신없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우리가 석가를 염송하고 예수를 찬송하며 공자를 흠모하는 것처럼….

며칠 전 한라산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백록담 근처까지 일천구백오십 미터의 등산길, 숨이 차 힘들고 목도 말랐지만 그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은 무엇이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름 아닌 단풍 속의 푸른 솔, ‘화사한 고독’이라고나 해야 할 듯, 솔이 버텨선 한라산 가을은 촐싹대지 않는 선비 같고, 굿꿋이 제 일하는 농부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절망너머 희망을 보고, 낙망 대신에 비전을 말하는지 모를 일이다.

단풍 저 신비의 화려한 의상도 결국은 사람을 닮은 자연의 섭리라니 어찌 감히 ‘자연보호’를 함부로 떠벌일 수 있는 건지? 이 가을 코를 일깨우고 눈을 살찌우며 정신을 맑히는 대지의 향연 앞에 삼가 사람의 위대함과 인생의 흥진비래를 되새김해 보았으면….

최한선 <전남도립대학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