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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서면 문자 그대로 노오란 단풍의 향연이다. 특히 은행나무 잎이 곱게 늙어 거리를 수놓으며 바람에 따라 우구구 노래하는 모습이라니, 흡사 예전 중국 춘추 시대 공자님의 제자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 유학의 경전을 읊조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행단(杏亶)이라는 말은 원래 은행나무 그늘 아래 만들어진 공부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것이 훗날 어의(語義)가 변화 되어 공부하는 장소란 범박한 의미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서원이나 향교 등 공부하는 공간에 은행나무를 심곤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은행나무와 공부하는 공간이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물론 있고 말고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바라보아야 열매가 열리는 특성을 갖고 있으니, 사람 인(人)자를 쏙 빼 닮은 글자가 아닌가. 우선 음양의 원리에 따라 남녀는 결합하여 종족을 계승 발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까닭에 서로 힘이 되어주고 버팀이 되라는 상형(象形)의 의미에서 사람 인(人)자를 만들었으니, 문(文)으로써 함께 모이고, 인(仁)으로 서로 돕는다는 것이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以友輔仁)이었다.

또한 은행나무는 암수 상응의 조화 외에도 매우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성한 열매를 보고 스승 밑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성대해지고 자손만대 승승장구하라는 기원을 담음직하지 않은가? 이러던 은행나무가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선 살구나무로 대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것은 아마도 외양의 풍성한 열매 맺음이 서로 흡사하고 행(杏)의 한자 음 발음이 살구와 은행이 같은 데서 둘이 혼용되다가 살구로 굳어진 듯하다.

덜도 더도 아닌 그만그만한 색깔과 크기로 길거리를 흐르는 은행잎을 보다가 문득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며칠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올 방애 찍었는디 와서 쌀 쪼깐 가져 가그라” 고향에 홀로 계시면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제 백사 하고 그 주 일요일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나만 온 게 아니라 칠 남매가 모두 모인 것이 아닌가. 어라, 어머니는 큰 아들에게만 전화를 하신 게 아니라 아들 딸 가리지 않고 모두를 부르신 것이다. 모인 칠 남매는 각기 “나, 혼자만 부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하면서 어머니의 당황해 하시는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어댔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옛이야기 ‘지즐대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주섬주섬 이것저것 챙겨들고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둘째 여동생이 “엄마, 이거 영 불공평한데요” 하면서 순간 주위를 집중시켰다. “뭐이야, 뭐가 불공평하다고야?” 어머니께서 바라바리 싸 주신 물건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당연 참기름 이었는데, 문제는 그 참기름을 넣은 그릇이 큰 아들 것과 나머지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큰 아들 것은 대두병(1.5리터 페트병) 이었는데 누이들 것과 작은 아들네는 맥주병이었던 거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둘째 누이가 알아차리고 어머니의 고질병 같은 큰 아들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던 게다.

“깨 털고 농약 하고 농사지을 때는 누구 와라, 뭐시기 와라 하면서 작은 아들 큰 딸 작은 딸 죄다 부르시고는, 나눌 때는 농사 때 코빼기도 안 보인 큰 아들만 챙기시유? 너무 하시네요” “뭐야, 뭐 그런다냐, 뱅은 달라도 양은 다 같아야” 으하하하. 우리 어머니의 개그맨 같은 즉석 대답이라니…. 손주 녀석들을 포함한 우리 칠 남매의 웃음소리는 가을 하늘로 퍼져 올라 하늘에 계신 아버님도 웃으실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한 가을 깊어가는 길목에서 새삼 어머니의“뱅은 달라도 양은 다 같아야” 라는 일갈(一喝)이 자꾸만 귀에 쟁쟁한 까닭은 무얼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으랴만 우리는 늘 그 ‘공평한 사랑’을 놓치곤 한다. 병의 크기는 달라도 그 속에 넣은 어머니 사랑의 양은 다 같다는 저 무량한 은혜로움의 일갈이라니….

최한선 <전남도립대학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