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프린트하기

지금은 아련한 추억의 사진첩이 돼 버린 내 유년의 이발소 풍경은 여태껏 생생하기만 한데 ‘이발소’ 석 자가 자꾸만 먼지 속에 묻히거나 미용실 위력에 지워져 간다니, 마치 늦가을 낙엽 벗은 나목 같아 마음 한 구석 휑하고 씁쓸하다.

이발소라,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 아저씨와 너 말 같지기 만한 엉덩이를 가진 면도사 아줌마 그리고 십구공탄 세 구멍짜리 연탄난로와 그 위에서 설설 끓고 있는 노란색 주전자가 눈에 든다.

이어 대 여섯 명의 동네 사람들이 두런두런 정화를 나누며 난로 불을 쬐고 있는 모습과 색 바랜 밀레의 ‘만종’ 비슷한 그림이 한 점 보이고, 면도날을 세우는 데 쓰는 짤막하지만 잘 늙은 가죽이 대롱대롱 걸려 있는 모습, 그 옆의 쓰레받기와 몽당 빗자루가 자기도 가족이라며 쓱 얼굴을 내민다.

지난 날 이발소는 듣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들려오는 이런저런 세상살이 이야기가, 포장되고 미화되며 뻥튀기 되는 뉴스의 광장이었고, 온갖 풍문과 추측 그리고 사건 사고가 재현되는 현장이었으며, 이발사 아저씨는 때론 예리한 판단과 지혜를 갖춘 경찰관이 되었다가 혹은 면도 칼 같은 이성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검판사가 되기 일쑤였다.

돌아보건대 이발사 아저씨는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은 물론 토정비결에서부터 미래 운명까지 모르는 게 없는 만능 박사였다. 누구 집 아들의 두상(頭狀)이 앞뒤가 툭 튀어나와 영리하게 생겨서 꼭 박사가 될 것이라든가, 누구 집 둘째는 코가 복코여서 부자가 될 것이라는 둥, 이발사 아저씨의 신나는 덕담 속에 동네 이발소는 한 겨울 추위를 녹이는 용광로였다.

어른이 된 어느 날 목욕탕에서 우연히 한 어른을 만났다. 그분은 대뜸 나에게 고향이 강진 어디가 아니냐며 아는 체를 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당신은 삼십여 년 전 우리 동네에서 이발소를 경영했는데 그때 내 두상을 여러 번 보아 그 기억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 맞다. 두상, 내 두상에 대해 이발소 아저씨가 했던 그 말씀, 그 예언대로 나는 박사가 되었으니 마치 춘향의 모친이 이몽룡의 장원급제를 빌어 암행어사를 만들었듯이 나의 오늘이 그 예축(豫祝)의 풀이 덕이 아닌지….

원래 추억은 먼지 속에 하나씩 덮어지고 묻어진다지만 마음에 담겨진 유년의 고향 풍경마저 지워져 가는 것 같아 허한 마음이 이 겨울을 더 춥게 만든다.

한 통계를 보니 십년 전 전국에 약 8만 5천여 개였던 이발소가 지금은 1만 5천여 개로 줄었다고 한다. 사내 어린이조차 이발소란 단어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니 미용실의 위력, 여권의 위세가 여기까지 미쳐올 줄이야.

물론 세상은 균형과 조화의 공연장임이 분명하므로 이발소와 미용실의 불균형은 다른 곳에서 채워지리라 생각하지만, 아주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 상실감은 작질 않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몰라보게 변하고 풍속은 달라지기 마련이라지만 이 세상 존재의 법칙인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까지 깨어져서야 되겠는가.

남녀유별은 남녀차별로 오해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조화와 균형은 인위와 강제로 조장되어선 곤란할 것이다.

강에 사는 고기와 바다에 사는 고기가 분명 다르기 마련이듯,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그 존재의 의의는 그 있어야 할 장소성 곧 공간의 점유성이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것이 있어야 조화요 균형이란 말이다.

브리티시 박물관에 한국의 지게가 있는 것 보다는 지게는 한국의 농가에 있어야 제격이듯이 이제부터라도 ‘제격’을 좀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찬바람 더 거세지면 봄날은 그만큼 더 가까울 것이다. 겨울이 춥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은 따스한 봄날이 아니었는가?

추운 겨울과 따스한 봄날의 균형감이 여름날의 오곡을 풍요롭게 길렀듯이 더 늦기 전에 우리도 하나하나 제격 갖추기를 열심히 했으면 좋으련만….

최한선 <전남도립대학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