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프린트하기

권력은 과격하고 거만한 자를 즐겁게 하고 재물은 조용하고 소심한 자를 기쁘게 해준다. 따라서 젊은이는 권력에 덤벼들고 노인은 부(富)에 아첨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은 평등을 용납하지 않으며 아첨을 위해 우정을 버린다. 모든 권력은 국민이 주는 위탁임에도 그리하고 있다. 이는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본다.

이 때문에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 장관급 대우에 온갖 특전을 누리는 현역의원의 호사와 끈 떨어진 전직 의원의 신세를 비교해서 정치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또 정치판에서는 의리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군(主君)'을 섬기듯 충성을 다하는 의리파도 더러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다. 정부 고위직을 지낸 민주계 B 인사는 퇴임식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대통령 사진 앞에 큰절을 했다.

큰 과오 없이 무사히 마친 것을 감사하면서, 그런 지극정성 때문인지 B씨는 또 얼마 안돼 요직에 발탁됐다. 그런가 하면 C 인사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을 때 차렷 자세를 했다. 사람들이 옆에서 지켜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실세였던 D씨는 개인 사무실을 청와대 근처로 잡았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으면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다. 이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과거 모셨던 어른을 지금도 변함 없이 섬긴다.

물론 이런 표피적인 언행만으로 충성심이 좋다고 평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아첨과 충성심에 따라 공천장도 받고 출세도 한다. 이렇다보니 집안 일을 돌봐주고 구두를 가슴에 품기도 한다.

이런 공헌도나 충성심에 따라 임명하는 것을 엽관주의 라고 한다. 한데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직사회가 벌써부터 술렁이고 있다. 일부 공무원들은 내년 선거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눈치보기와 줄서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양 세다.

현직 단체장의 자리가 위태로운 지역이 늘어나면서 6월 선거방향 등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새 단체장 취임 이후 예상되는 시책 변화와 그에 따른 조직개편 등과 맞물려 인사 후 폭풍에 대한 우려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실제로 광주, 전남 일부지역에서는 공무원들이 차기를 노리는 유력 입지자에게 줄을 서는가 하면, 현 단체장이 조직 이탈을 막기 위해 이미 '적군'과 '아군'으로 구분 지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단체장이 재선이나 3선 고지를 노리는 지차제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특히 승진을 위해 현 단체장에게 충성(?)을 다하는 일부 공무원들은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올 상반기 인사에서 승진대열에 끼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더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경남에서는 밀양시 정보통신담당 공무원이 시장의 e-메일 정보를 빼내 다른 지방선거 출마예정자 측에 건네기도 했다.

해킹 당한 e-메일은 밀양시 공무원이 보낸 것으로 "승진에 감사하며 지방선거에서 적극 지지하겠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해당 공무원의 도덕적 해이도 기막히고,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줄서기 구태가 벌써부터 나타났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공무원 줄서기는 논공행상식 선심성 인사, 아니면 보복성 인사를 낳는다는 점에서 지방행정의 효율화에 암적인 존재다. 민선 4기 구청장 출범 이후 서울의 모 구청에선 부구청장을 비롯해 국장, 과장 등 간부직원 25명이 강제 전출되는 일도 있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주민복리를 위한 행정이 정착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풀뿌리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키워 나가려면 공무원 줄서기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시급하게 요구된다.

현장에선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공무원이 평가받는 인사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 동시에 광주, 전남이나 밀양사건 같은 일들은 사정 당국이 엄정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낱낱이 밝혀 불법이 있다면 엄중 처벌해야 한다.

고운석<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