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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 앞에 새삼 고개 숙여 감사 드리며 경배를 올린다.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창조자란 신도 시인도 아닌 시간이 아닐까 한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무상한 변화는 달리 이름하여 위대한 창조가 아니겠는가?

막막한 절망도 시간이 지나면서 샘솟는 희망으로 바뀌고, 현실의 혹독한 질곡도 시간 앞에선 어찌할 바 없이 무너지기 마련임을 역사는 생생하게 증언한다. 일제 치하의 노예 생활도, 군부 독재의 숨막힌 질식도, 모두 시간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지배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허’의 자세는 시간이 가르쳐준 위대한 교훈이다. 하충(夏蟲), 곧 여름 벌레가 겨울을 모름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간혹 우리 주위엔 하충과 같은 어리석음이 판을 주도함에 아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시간의 흐름 따라 우리 인생에는 간이역과 종착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급행 기차가 지나쳐 버리는 작은 간이역, 내가 그런 간이역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할지라도, 그걸 쉽사리 용납치 아니한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가 아니던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간에 우리는 인생에서 여러 간이역을 거칠 수밖에 없다. 마치 숱한 간이역을 지나 종착역으로 가는 기차처럼 우리 인생도 시간 따라 여정(旅程)을 떠날 수밖에 없는 유한 생명체가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이 나이가 들면 땅의 기운, 이른바 근육의 힘과 탄력이 떨어지고 육신에 힘이 빠진다고 한다. 이름 하여 지(地), 곧 땅의 생기가 흩어지는 결과에 다다른 것이다. 이어 수분이 줄어듦을 느낄 것이다. 온 몸에 물이 마르고 건조해져서 여러 군데서 원활한 흐름이 막힌다. 속칭하여 물이 마르면 생명이 다 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다음에는 열이 약해진다. 다시 말해 뜨거운 심장의 혈맥이 골고루 몸 전체로 미치지 못하므로 수족이 차고 머리가 멍 하는 등 진공 상태 같은 상황을 맞는다.

그리하고는 마침내 혈압수와 맥박수가 줄어들면서 눈의 동공이 풀려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들숨과 날숨의 균형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결핍이라는 간이역을 지나, 우리네 생은 종착역이라는 죽음에 이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이 지역은 나의 간이역인가 아니면 종착역인가? 간이역도 좋고 종착역이어도 좋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구의원 후에 시의원을 하고 그 다음엔 구청장, 그리고 다음엔 국회의원을 한 뒤 광역단체장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면 어쩌겠는가? 그는 필시 광역단체장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지 않겠는가?

간이역을 잘 통과해야 종착역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기에 그 사람은 구의원부터 열과 성을 다 할 것임이 분명하다. 안타깝고 짠한 것은 지나야 할 간이역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급히 서둘러 종착역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무어라 필설로 다 위로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간의 위대한 창조주 앞에 오만을 부리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지역을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하지는 않은지 냉정히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지역 지자체들은 각기 ‘천혜의 땅’ 운운하면서 은퇴자 도시니 예술인 창작 집성촌이니 등의 기치 아래 사람을 부르고 있다.

이른바 자기 지역이 인생 종착역으로서 적지성이라는 구호를 외치고들 있다. 하지만 그런 구호는 대답 없는 메아리일 공산이 매우 크다. 생각해 보라. 서로 다른 간이역을 지나쳐 온 사람들, 상이한 여정을 밟아온 사람들을 별 탄탄하지도 아니한 끈으로 묶어 한 자리에 모으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애써 굳이 명분 없는 일을 벌일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을 간이역이자 종착역으로 생각하고 우리 지역에 꼬박꼬박 세금 내고 있는 토박이들에게 보다 깊은 정을 쏟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보다 세심한 배려를 하길 바란다.

지역 언론들도 이를 위해 지역 특성을 감안한 기획 기사, 전문 기사를 많이 다루어야 되지 않을까? 우리 지역민들도 지역의 대변지인 지역 언론에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마땅하리라.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우리 지역은 나의 간이역이면서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간은 간이역을 지나 종착역으로 변화의 바람을 몰아가는데 알량한 자리에 앉은 사람 하나 망상에 취해 있다니….

최한선 <전남도립대학 교수·전남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