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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해 악을 행하지만 그 악은 숨어있기를 싫어하니 언젠가는 드러난다. 반면 덕은 남몰래 베풀어도 천리를 가도 빛난다. 한데도 대원군의 형인 흥이군 이최응은 세도의 후광으로 재백(財帛)이 날로 늘어 창고가 제1고(庫)에서 제9고까지 늘어나고 있다.

그는 매일아침 일어나 고지기로 하여금 자물쇠를 열고 졸노(卒奴)로 하여금 고문(庫門)을 열라하고 가득찬 재백을 점검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한다.

한데 제7고에 쌓인 생치(生致)와 동태가 썩어 곳간 밖까지 악취가 풍기자 고지기가 상전에게 아뢰기를 「소인(小人) 생각으로는 덜 썩은 것을 골라 친척과 이웃에 나눠주고 반쯤 썩은 것은 하인배와 복청다리 밑 노나리꾼에게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했다.

이때 흥인군 말이 재물이 밖에 나가면 안빈수분(安貧守分)을 하지 않은 증거가 되니 나의 부덕을 탄로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어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장안에는 정가소라는 익살꾸러기가 있어 사대부(士大夫)들 사랑에 돌아다니며 흥인군의 곳간 점고는 정가소의 특기로 무척 사람들을 웃겼다 한다.

80년대 초 일본 동경호텔에서 만난 한 한국의 기업인은 약 3백만 달러어치의 상품 수출을 그곳에서 흥정하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이 사장은 외국어가 전혀 불통, 자기 혼자는 외출도 못하고 또 밥도 먹으러 갈 수 없어 당시 대사관 직원이 시중들고 있었는데 이 직원이 바쁜 일로 끼니가 되어도 오지 못하면 굶기 일쑤라 했다. 충분히 비서나 실무 책임자를 대동할 수 있을 만한 재력도 있고 또 그러할 만한 흥정인데도 빈(貧)의 소비철학에 찌들어 있기에 이 돈 많은 한국인은 굶으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처절한 상황을 무의식중에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두 가지 실례는 빈의 철학이 체질화한 소비를 하는 한국인의 개연성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요즘 일부 재벌 오너들은 돈을 물쓰듯하고, 해외로까지 돈을 빼돌리다 법망에 걸려들기도 한다.

또 일부 재벌 二세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를 이용 방탕과 추문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청업체들에겐 납품가를 내리거나 어음결제 등으로 고통을 주고 있다.

외향성소비에 길들어 있는 구미인은 벌면 그 돈을 사회로 되돌려 준다. 장학도 하고 구휼(救恤)도 하고 학문의 뒷받침도 하고 의학발전에 기여도 하여 소비를 전세계적으로 확대한다.

오히려 내향소비에는 인색하여 二세를 퇴폐시킨다는 법이 없기에, 그 부는 二세 三세에 망한다는 법 없이 영속을 하게 돼있다. 미국에선 최근에도 억만장자 40명이 절반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돈 175조원에 이른다. 한국에서 가장 영속한 부자로서 경주 최준 가문을 든다. 10대 진사(進士), 10대 만석(萬石)이었으니 적어도 3백년 동안 만석의 부를 유지했음은 이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10만석 5만석 군이 수다한 데도 겨우 만석밖에 하지 않은 최씨 문중(門中)이 부자로 소문난 이유가 딴 부자는 당대나 二대에 망한데 비해 이같이 영속했던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만석 이상의 부가 들어와도 취(取)하지 말고 그 잉여의 부를 소작인이나 인근 가난한 사람에게 돌리고, 또 아무리 높은 벼슬이 주어져도 사양하고 진사 벼슬로 자존하라는 문중가법이 엄하였기 때문이다.

곧 높은 벼슬이 가져오는 화를 예방하고 부의 내향적인 소비가 몰아오는 폐를 예방하여 외향소비를 했던데 10대 만석의 유일한 이례를 있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주 영천 그 너른 지역에 사는 농민이면 최씨의 외향소비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기에 인망이며 인덕 또한 대단하여, 그가 애써 가난해지려고 노력해도 가난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대에 와선 유한양행을 창업한 고 유일환 박사가 있지만, 재벌들이 영속한 부자로 살려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고운석 <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