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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처서를 넘기면서 한풀 꺾인 듯 이젠 제법 가을 맛이 난다. 이렇듯 절서는 어김이 없으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난다. 계절의 순환, 저 철리(哲理) 앞에 어느 누가 감히 대적을 하겠는가? 봄이면 꽃이 피고 그 꽃이 가을에 결실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앞에 농부는 기대와 희망을 키우며 미래를 설계해왔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철리를 믿는 농부의 후손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 교육 정책, 특히 입시 제도를 보노라면 정말이지 기대와 희망을 잃게 하고 있어 유감천만이다. 며칠 전 새로운 입시제도 시안이 발표되었다. 골격은 국어, 영어, 수학을 A, B 두 유형으로 나누고, 과학탐구와 사회탐구 영역은 줄여서 각 탐구 영역의 여러 과목 중 한 과목만 선택하여 수능에 응하게 하되, 수능은 두 번 치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어, 영어, 수학을 A, B 두 유형으로 나누는데, A는 지금 수능보다 쉬운 난이도로, B는 지금 수능의 난이도를 유지하되, 한 사람이 국어 B, 영어 B, 수학 B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다는 규정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명문 대학은 난이도가 높은 B 유형을 선택한 학생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한데 그 경우 영어와 수학 점수에 비중을 둘 개연성이 너무나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수험생이 국어와 영어, 국어와 수학의 경우 동시에 같은 B 유형을 선택할 수 없으나, 영어와 수학은 동시에 B 유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안은 한마디로 국어의 비중을 줄이겠다는 의도의 반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사를 사회 탐구 안에 넣어 선택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좀 더 강하게 말해서 국사를 선택 과목으로 홀대하고도 뭐가 부족해서, 국어마저 경시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영어와 수학은 B 유형이 동시에 선택되는데, 국어와 영어, 국어와 수학은 안 된다는 발상인지, 이런 안을 만든 사람들의 두뇌 구조가 궁금하다. 대통령은 국격(國格)을 운운하면서 국민의 사고와 자세의 성숙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밑에서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의도와 국정 철학에 위배되는 작태를 벌이고 있으니 이는 분명 우리나라 사람이 아닐 듯싶다.

일본은 호시탐탐 독도를 노리고 중국은 정책적으로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등 동북공정을 일삼고 있는 이 절박한 시기에, 소위 국가의 백년, 천년, 만년지계를 논해야할 교육정책자들의 망국적 입시제도라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숨이 찰 뿐이다.

왜 저 따위 시안이 나온 것일까? 답은 쉽다. 일반 고등학교, 이른바 공교육을 무시한 처사다. 언제부터 공교육을 무시하고 특목고 등이 생겨나면서 그들을 입시에서 우대하겠다는 의도적 혜택이 일반 공교육의 현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왜, 공교육을 무시하는가? 그 것은 미국식 사고의 반영이다. 돈이 있으면 차별화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저 사고, 그것은 특정분야에 재능이 뛰어나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옳다는 특수 목적 아래 설립된 특목고와는 그 정신이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목고는 있어야 마땅하되 일반 공교육이 무시되거나 홀대받아선 안 되지 않겠는가? 국사가 선택인 나라, 그 것도 부족해서 국어마저 영어, 수학의 뒷전에 머물게 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다른 행성에 세우게 하면 안 될까? 임종을 앞둔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불러놓고 “큰 아들아, 너는 국사를 연구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바르게 세우는데 노력해라”, “둘째야, 너는 국어를 제대로 연구하여 우리 국어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도록 해라.” 그 아버지의 유언을 들은 두 아들은 <국어사개설>과 <한국사신론>의 명저를 남긴 이기백, 이기문 두 형제 교수이다.

입시 제도를 만드는 자들이여, 그대, 먼저 위 두 저서를 읽으시고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임을 명심하시오. 이젠 여름 지나 찬바람이 터지는 가을이 아니오? 그대들, 철리를 가벼이 보시지 마시고 조국의 역사와 모국어의 위대함을 함부로 대하여 역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지 마시길….

최한선 <전남도립대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