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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철의 기후는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추운 겨울 날씨는 만물을 얼어죽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봄 겨울 사이에 무더운 여름과 풍요로운 가을이 낀 4계절이다.

한데 14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한 해를 여름, 겨울 두 철로 나누었다. 봄(Spring)이란 말은 16세기부터, 가을(Autumn)이란 말은 14세기의 시인인 초서가 처음 쓰고 있다.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 없었기에 겨울 속에 꼬리를 끄는 여름, 곧 늦더위나 잔서(殘署)를 나타내는 말이 많다. '작은 여름', '주저하는 여름', '노처(老妻)의 여름' 등등…. 미국에서는 가을 더위나 초겨울 더위를 '인디언 섬머'라고 한다. 인디언이 꼭 이런 날씨를 골라 쳐들어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인디언처럼 변덕이 심해서 얻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노처의 여름'에서 발상된 것인지 잔서를 '늙은 장모의 여름'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장모 이미지가 대체로 좋지가 않다. 우리의 찜통더위니 살인더위니 하는 '여름' 표현인데, 미국에선 장모에 붙어다니는 형용사가 잔소리 많은 장모, 사나운 장모, 심술장이 장모 등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리 속담에 장모는 사위가 곰보라도 예뻐한다느니, 사위에겐 어머니보다 장모라느니, 기쁜 일은 꿈에 사위 본 듯하다 하고 반가운 일이면 사위가 왔나 신을 거꾸로 신고 나오게… 한다.

장모관도 이렇게 다를수가 있는 법이다. 여권이 센 나라일수록 가정에 있어 아내 → 장모의 권한이 세지고 사위에게 있어 장모가 압력존재로 군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늦더위를 늙은 장모의 여름이라고 호칭한 잠재심리를 알만하다. 이세상 사람들의 심리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지 우리 한국에서 따가운 늦더위 볕을 '며느리 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늙은 장모의 여름'과 발상이 같을수가 있을까 싶다.

미국에서는 사위 입장에서, 한국에서는 시어머니 입장에서 비유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말은 죽 먹은 설겆이 딸 시키고 비빔그릇 설겆이 며느리 시킨다 하듯이 따스한 봄볕에 딸을 쬐이고 살갗 타는 늦더위 가을볕에 며느리 쬐인다는 속담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만큼 더위가 힘듦을 말한 것이다. 한데 지금 우리에겐 입추가 지나고 말복도 지나고 풍요로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하여 황금들녘을 그리며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유럽에선 이런 가을이 우울한 사멸(死滅) 이미지다.

어느 한 가을날 오후 하얀 고양이를 안고 죽어갔던 연인을 몽상하는 말라르메의 시까지 있다. 정서에 농도짙게 젖기 위해 창밖에서 풍금을 키며 한푼 적선하라는 거지에게 돈을 던져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시는 끝나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가을의 시로 자주 거론되는 시다. 가을을 소재로 한 유럽의 명시들을 보면 3편 가운데 2편은 이같이 우울한 시다.

고위도(高緯度) 지방인 유럽에 있어 생존을 위협하는 그 지루하고 혹독한 겨울의 전주곡인 가을이 반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인생에다 비유하면 중노인(中老人)이요, 하루로 치면 석양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최후의 만찬으로 비유한다. 방향으로 치면 가을은 해저무는 서쪽이요, 빛깔로 치면 하얀 빛, 맛으로 치면 떫은 맛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우울한 이미지의 가을을 계절 속에 끼워주기에 인색했으며 가급적 소외시키려 애썼다.

완연한 가을인 10월 중순경을 '성(聖)마틴의 섬머'로 불러 가을을 여름호칭권에 잡아둠으로써 계절에서 따돌리려 했던 것이다. 미국에서까지도 가을을 '인디언 섬머'로 불렸던 것도 이 가을을 앞에서 말한것처럼 싫어하는 전통의 여파로 볼수가 있다. 하지만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우리에겐 가을이 신의 혜택인 것이다. 그래서 더위에 시달려도 우리 한국인은 사철 가운데 가장 가을을 선호한다. 한데 기후변화로 여름은 길고 가을이 자꾸 짧아져 가고 있다니 걱정이다.

고운석 <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