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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이석정(李石亭, 1841-1910) 선생은 사학(四學), 즉 성리학(性理學) 시학(詩學) 천력(天曆) 산수(算數)에 능했으며, 실학(實學)과 서화(書畵)에 통달한 대학자였습니다. 그이의 학문적 업적은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稿)’라는 유고집으로 집대성돼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들어서는 길 모퉁이의 작은 초가가 바로 그이의 생가입니다.

초가를 먼저 찾아, 선생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나무부터 살폈습니다. 생가는 잘 단장돼있었지만, 별다른 나무는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학문에 있어서 일가(一家)를 이룬 선생의 단아한 기품을 드러내듯, 생가는 학문 외에 별다른 욕심이 들지 않은 무척 소박한 초가입니다.

생가를 뒤로 하고, 만경벌이 훤히 내다보일 듯한 마을 뒷 동산으로 걸어 올랐습니다. 땀이라도 들이고 다음 행선지로 떠날 요량입니다. 작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골목길 양옆의 집들은 적잖이 풍요로워 보입니다.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비탈 길을 오르다 보니, 동산 마루 턱에 근사하게 지어진 정자가 나타납니다.

정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그루의 느티나무입니다. 줄기로 보아 짐작컨대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닌 듯합니다. 줄기에 비해 나무의 가지퍼짐은 놀랄 정도로 넓습니다. 정자 옆에 서있는 느티나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정자 노릇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굳이 잘 지은 정자가 따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아무렇게나 놓여진 볼품 없는 평상이야말로 땀을 식히고 편히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나무가 펼쳐내는 짙은 그늘에 들면 마치 아늑한 어머니 품에 든 것처럼 편안해집니다. 한 여름에 모기도 들지 않을 만큼 그늘이 시원하다는 옛 사람들의 느티나무 예찬을 실감할 만큼 스치는 바람이 서늘합니다.

평상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땅끝으로 하염없이 이어지는 만경 벌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까지 후련해집니다. 후련한 마음으로 느티나무가 쉼없이 뿜어내는 날숨을 가만히 들이마십니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필경 나무의 날숨입니다. 온 몸을 휘돌고 어느 틈에 코끝으로 배어나온 날숨은 다시 나무의 들숨이 됩니다. 저 너른 벌판을 바라다보며 나무와 나누는 아름다운 교감입니다.

나무의 살아있음으로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돌고도는 생명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아름다운 느티나무 앞에 서있는 질박한 비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식수비(植樹碑)’라 이름한 비석 뒷면에 적힌 글이 재미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씨앗으로 싹터 자라다가 서기 1928년 4월경 이웃 동생과 함께 여러분의 손으로 이 땅에 옮겨져 오늘날까지 이렇게 잘 자라고 있으니 계속 아끼고 보살펴 주시기 바라나이다. 이 정자나무의 연륜을 알리기 위하여 서기 1985년 11월 이를 세웁니다.

나무가 심어진 것은 80년 전이고, 그 나무를 더 잘 보살피려 식수비를 세운 것은 20년 전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 나무가 가지는 의미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삶을 더 평안히 지켜줌으로써, 사람살이를 더 평안하게 이끌어내려는 아름다운 지혜가 돋보이는 마을이지요.

나무의 삶과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하나입니다. 농사 일을 하다가 이마에 흐른 땀을 식히러 자연스레 나무가 지어내는 푸른 그늘에 몸을 누이고 잠시 쉬어가는 일은 사람살이에는 꼭 필요한 순간일 겁니다. 80년을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만들어낸 맑은 산소로 마을 사람들의 지친 몸을 받아들여 쉬게 했던 그 나무가 바로 20년 전 그 사람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삶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아름답게 살아가는 마을, 그곳은 바로 사람이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느티나무 아래로 오가는 지팡이 짚은 마을 노파들의 휜 허리 위에 짊어진 것이 삶의 무게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삶의 깊은 연륜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 나무와 사람과의 완벽한 교감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