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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익어가느라 나뭇잎 색깔이 알록달록해지고 공기가 상큼하며 하늘은 드높고 구름이 얇다. 훅 불면 금세 흩어져 없어질 것 같은 창백한 구름이다. 천상과 지상의 조화론 향연은 저절로 탄식을 자아낸다. 이런 모습 보노라면 숙연해지기도 하고 가슴이 설레기도 하며 울컥해졌다가 심각해져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수박이나 참외 등속은 꽁지를 보이며 서서히 뒷걸음치기 바쁘고 그 자리에 빨간 사과와 노오란 나락이 풍경화를 그린다. 밤이 깎지를 박차고 나오며 은행이 익은 것은 그 다음 차례며 붉은 홍시가 막내로 태어나면 찬 처리 가득하니 이른바 가을의 끝이다.

이처럼 사람의 감성을 한껏 자극하는 자연의 섭리는 키움이라는 사랑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 키움의 사랑을 본받아 사람들도 짝을 찾아 사랑을 하고 대를 잇는지 모른다. 이제 익히기 위한 여름 햇살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익지 못한 것들은 부지런히 빛을 모아야 하고 여태 짝을 찾지 못한 매미는 고추잠자리라도 붙잡고 시간을 벌어야 할 때이다.

목전에 시험을 둔 입시생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이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무서리 대지를 덮으면 엄숙한 동면의 가부좌 시간이 찬란한 새봄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를 키우고 사랑을 완성시키면서 익어간다.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침나절 시간이 부족한데 저녁이라고 싫을소냐?/오늘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 길이나마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하나의 푸른 명아주 지팡이가 다 못 쓰게 되어 가는구나/” 송순 선생의 <면앙정가> 한 대목이다. 이 가을과 딱 어울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전원의 생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이른바 강호 전원가사의 백미이다. 이 대목의 절정은 마지막 구절 “지팡이가 다 못쓰게 되어가는구나”이다. 여기저기 구경 갈 곳, 이것저것 할 일이 너무 많아 쉴 틈이 없다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속에는 전원생활이 이렇게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바쁜데 애써 굳이 벼슬하려고 몸부림치며 목숨 걸 필요 있겠느냐의 반문이 읽혀지고 있어, 인생을 달관한 대가의 풍모에 잔잔한 미소가 스민다. 이런 가사문학은 이미 15세기에 탄생했다. 이 지구상에서 대문호라고 이름 난 세익스피어도 16세기에 이르러야 모국어로 자득한 문학을 창작했으니 우리 민족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자긍심이 절로 인다. 그 것도 한문문화가 교양과 신분 상승의 척도를 가늠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우리의 국어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자유자재로 저렇듯 뿜어내었다니 이를 어찌 교과서에만 묵혀둘 일이란 말인가?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국민들 삶의 품격을 제고하면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하고 탐방객의 흡입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대 영어권, 독일어권, 스페인어권, 한자권 등 세계 4대 언어권의 문학과 어깨를 견주어도 그 우수함과 그 자재로움, 그 우리다움에 우뚝 빛나는 우리 문학의 완성도를 어떻게 세계화 하고 어떻게 원생성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국민 정서의 함양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인지 우리 모두의 지혜가 요망된다.

이젠 지방화 시대인 만큼 지방에 맞는 지방 활성화의 대책이 지방민에 의하여 도출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성이 난무한 금속성의 시대를 감성의 열매 튼실한 문화의 시대로 전환하기 위해서, 15·6세기 세계 문학인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우리 남도, 남도인의 잘 익은 가슴, 가슴이 필요한 때이다.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