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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돈(錢) 앞에서는 천륜도 인륜도 없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도세자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보면 영조(英祖)께서 사도세자를 병적으로 미워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영조가 세자궁 앞을 지나면서 밥 먹었느냐고 묻자 달려나와 먹었습니다고 대답하는 대목이 있는데, 임금은 세자가 한 말에 귀가 더럽혀졌다 하여 귀를 씻고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 욕말이나 악담이나 음담패설이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귀를 씻는 귀씻이(洗耳)라는 관습이 있었다. 귀씻이 말고 눈씻이(洗眼) 입씻이(洗口)라는 관행도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보지못할 부도덕적인 행위나, 짐승을 잡는 등의 흉사(兇事), 음사(淫事)를 보거나 또는 욕말을 했거나, 음담패설을 입에 했으면 집에 돌아와 그에 오염된 눈과 입을 씻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사실보다 그 사실에 붙어 다니는 그림자 같은 정신적 가치를 중요시했다는 자랑스러운 전통이요 유전질인 것이다. 이와같은 사고방식은 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었다. 엽전 한 닢 지폐 한 장이 지닌 제값은 똑같다 하지만, 그 돈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었느냐로 그 가치는 달라졌던 것이다.

이를테면 복전(福錢)이라 하여 땀흘려 번 돈이나, 효자 열녀로서 임금이 내린 돈이나, 큰 공을 세우고 받은 녹(祿)이거나 한 돈으로 장사를 하면 재수가 붙고 과거 치르러가는 노자를 삼으면 급제한다 하여 복전 빌리고자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그 이자도 한달에 1할의 고율인게 상식이었다. 반면에 뚝섬 객주(客主)로부터 나온 돈은 반값이요, 도화동 권번=기방(券番=妓房)에서 나온 돈은 그 반값이며, 노량진 풍류방(風流房)에서 나온 돈은 다시 그 반값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말에 뚝섬 객주는 세도가의 앞잡이로 벼슬팔아 꾸린 돈이기에 악전(惡錢)이요, 권번 돈은 웃음을 판 화대(花代)이기에 악전이며, 풍류방의 돈은 남을 저주(詛呪)하는데 쓰일수 있기에 악전인 것이다.

깐깐한 양반들은 돈을 받을때 그 돈의 내력을 알아보거나 내사를 시켜 받았으며, 출처를 모르는 돈일 때는 잿물이나 양잿물에 돈을 담가, 도사렸을지도 모르는 악을 씻어냈던 것이다. 이처럼 돈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부도덕적인 악을 빼는 작업이 귀씻이 눈씻이 입씻이와 같은 차원의 돈씻(洗錢)인 것이다.

전통사회에 있어 돈세탁은 이처럼 악전을 도덕적으로 선전화(善錢化)하는 수단이었는데, 요즈음 돈세탁은 오히려 부도덕적으로 악전화(惡錢化)하는 범죄수단이 되어, 권력이 있는 곳이나 돈 잘버는 곳이면 돈세탁소들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그 구린 돈이 선거판까지 횡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데 전주언 前 광주 서구청장은 공직 선거법 위반과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지 3개월만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야간조명 사업자 등으로부터 10억 원을 받은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오현섭 전 여수시장은 6·2지방선거 직전 민주당 주승용 의원(전남 여수 을)측에 7,000만 원을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또 전남 여수경찰서는 2일 "오 전 시장이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여수시 의원 등 20여 명에게 '잘 부탁한다'며 두 차례 금품을 살포한 것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오 전 시장이 살포한 금품의 출처는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이순신 광장 건설업체와 야간경관 조명사업 업체의 뇌물 등 두 건. 경찰은 오 전 시장이 올 5월경 김 모씨 등 3명을 통해 전남도 의원이나 여수시 의원 출마자 20여 명에게 각각 500만 원에서 1,000만 원을 살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돈의 출처는 이순신 광장 건설업체로부터 받은 돈 가운데 일부라고 한다. 악의 오염에서 정신을 구제했던 귀씻이 눈씻이 돈씻이의 전통적 유전질이 새삼스러운 작금이다.

고운석 <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