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동네 명약은 작설차 | |
| 화순 능주면 만인리 인량동 | |
| 입력시간 : 2010. 10.09. 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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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깊은 골짜기 안에 들어앉아 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숨겨진 마을이다. 조용하고 아득한 게 사람 살기에 참 좋은 곳임을 금방 알겠다. 그래서인지 인근의 마을은 죄다 만세동, 천년동 등 단위가(?) 높은 이름을 갖고 있다.
"저 꼬랑에 인량사라는 절이 있어서 인량동이여”
구 국도에서 길을 꺾어 마을 초입에 서는데 필리핀에서 시집 온 엄마와 딸 셋이 손에 그림책을 들고 더위 속을 걷고 있다. 차를 세우고 태워서 물으니 화순읍에 가서 콩콩이 태워주고 오는 길이란다.
인량동 당산에서 차를 세우고 아이들을 내리니 당산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할머니들이 웬 사람인고 바라본다.
마을 이름이 뭐냐니깐 만인리 1구라고 한다. 어디를 가나 행정구역명을 말한다. 자연마을명은 요즘 어른들조차 잘 쓰지 않는다. 인량동을 물으니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느냐고 묻는다. “동네에 어질고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사나봐요.” 할머니들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 “그것은 맞는 말이여.”
그런데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할머니(백암댁). “저 꼬랑에 인량사라는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허등마.”
마을 내력을 알고 싶다하니 일제히 황토색 지붕 문간채를 가리킨다. “저 집으로 가봐.”
다가가 열린 창으로 보니 구교춘(76) 할아버지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산대밭 고랑에 인량사라고 절이 있었다고 그래. 빈대가 많아서 망해 불었다고 허는디. 그래서 우리 마을 이름도 인량동이여. 들리는 말로는 400년 전에 없어졌다 허는디, 암튼 그 꼬랑으로 죄다 차밭이여.”
“저기 부처밭 등까지 죄다 차밭이여”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산대밭 고랑에 있는 자두가 익어 따러 갈 참이란다. 구 할아버지가 청년처럼 밀짚모자를 힘껏 눌러쓰고 경운기를 몰고 앞장서자 나는 차를 몰고 뒤따라나선다. 해방 무렵에 만들었다는 만인제 저수지를 지나 산대밭 고랑으로 올라서니 찻잎이나 죽순 등을 채취하는 사람은 몽땅 물어내고 고발조치한다는 내용의 경고판이 붙어 있다.
원래는 산대밭 고랑 일대가 천석꾼인 양옥성이라는 사람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만세동에 사는 구교은·교춘 형제 소유로 되어 있다. 구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그 산을 관리하면서 어렸을 적부터 차나무를 보고 자랐다고 한다.
“우리는 옛날부터 그냥 작설차라고 그랬어. 해마동 쫌씩 만들어 그냥 집에서 낄애(끓여) 묵제.” 구 할아버지는 찻잎을 뜯어 씹는다. 얘기할 때마다 향이 날아온다.
“저기 부처밭등까지 죄다 차밭이여. 어뜨케 알고들 오는가 간간히 와서 뜯어가기도 해. 경고판 붙애놔도 소용없어. 막 뜯어가는디 어뜨케 말길 것이요 잉.”
같이 올라왔던 할머니는 자두를 따고 있다.
“이 양반이 일을 안 흘라그요. 맨날 논이나 볼라그제 힘든 일은 안 흘라 근단 말이요.”
내일 광주 사는 딸네 오면 줄 것이라며, 내 것은 따로 비닐봉지에 담는다. 빨갛게 잘 익은 자두들이 예쁘다. 빨간 자두와 여기저기서 자라는 녹차 나무의 싱그런 이파리가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차는 능주 작설차’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인량사터 밭에서는 구채순(75) 할머니가 콩밭을 메고 있다.
“폿죽(콩죽)이나 낄애(끓여)묵을라고 했등마는 맨 돌밭이여. 맨 기왓장배끼(밖에) 안 나와.”
와편이며 도자편이 흩어져 있는 게 절터라는 걸 금방 알겠다. “일 흐다가 정때쯤 되믄 딱딱 목탁 치는 소리가 나요. 요 밭에서. 영락없는 절터여, 여기가. 여기다 뫼를 쓸라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디다만 문중 땅이라 안 폴고 나가 여지껏 20년 동안 부쳐묵고 사요. 백암 송씨들 땅인디 우리 영감이 벌초해주고 해서 우리가 부쳐묵고 있소.”
차나무 있는 거 아느냐 물으니 할머니는 호미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더니 웃는다.
“평생 살았어도 차밭 있단 소린 첨 들어보요.”
자료를 보니 만인리(인량동, 만세동) 뒷산 국사봉 자락 5ha의 녹차밭은 이미 200여 년 전에 빙허각 이씨 부인이 지은 《규합총서》중 팔도 특산물을 소개하는 <동국팔도소산(東國八道所産)편>에 나와 있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차는 능주 작설차이다’. 기록이 이와 같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차’ 명맥 잇는 ‘화순 작설차회’
작설(雀舌)이라는 단어도 화순 출신인 고려시대 국사인 진각국사 혜심(1178 1234)의 시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소반 가득 옥가루 쌓아놓고 손으로 새기노라니/ 우뚝한 산의 형세 방불하구나
구멍 뚫어 용천에 비기고 / 물을 떠서 작설을 끊인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작설차는 고려 때 이미 유행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전통이 1809년에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에 기록하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이 전통을 요즘 화순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화순 작설차회’가 그들이다. 이들 회원들은 2008년 6월 화순지역 차 재배자와 제다(製茶)인, 연구자, 차실대표, 차를 즐기는 다인 등이 중심이 돼 ‘화순 작설차’의 명맥을 되살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창립했다. 얼마 전에는 야생차밭에서 명차 만들기 행사도 했고 화순의 명정(明亭)인 영벽정에서 다회(茶會)를 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작설차가 좋은 줄을 몰라요”
장마의 시작인지라 느닷없는 빗줄기에 카메라를 숨기고 뛰어 내려오다 구교동(78) 할아버지 문간채로 들어 비를 피했다. 차밭에 갔다온다 하니 할아버지는 두말없이 뒤뜰로 따라오란다. 그곳에는 30여년 전에 할아버지 아들이 국사봉 자락에서 옮겨 심은 차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나가 쪼그래 앉다 일어서면 다리가 쨍기고 아팠는디 이 차를 묵고는 우선흐단 말이요. 나가 효험을 봤제라.”
동네에서는 차가 명약이다. 그 중 구현우(64) 할아버지는 작설차의 효험을 톡톡히 본 분이다. 두통이 있었는데 싸악 낳았다는 것이다. 하동에서 차를 만드는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나오기에 흉내를 내서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18년 동안 만들어 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작설차가 좋은 줄을 몰라요. 이 마을에 살면서도요. 손이 많이 가니까 귀찮아서도 사람들이 만들라고 안해요.”
직접 덖었다는 작설차를 내 온다. 냄새가 좋고 입안에 향기가 돈다. 가져가 먹으라며 한 움큼 비닐봉지에 덜어낸다.
천년지하만년부복지(千年之下萬年富福地)의 마을
당산으로 나오니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논다. 그 중 조나연(6)이가 “아까 집까지 태워다 준 아저씨다!”하며 반가워한다. 당산을 배경으로, 마을 회관 벽에 기대어 앉은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요즘 시골에서 아이들 소리 듣기 어려운데 청량한 웃음소리 오랜만에 듣는다.
당산 아래에 있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열녀각에 가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니 귀를 쫑긋하고 듣는다. 귀신 나오는 집인 줄 알았단다.
당산에 있는 마을 우산각에 앉으니 마을 앞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참 시원타! 이 좋은 뜰과 산이 있으니 천년(천년동) 만년(만세동) 살 것 같은 마을이다. 하긴 이 일대가 ‘천년지하만년부복지(千年之下萬年富福地)’라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글/ 사진=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
파인뉴스 기자 470choi@hanmail.net 파인뉴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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