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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는 것은 가을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가을엔 과일의 속살이 튼실하게 차고 나뭇잎은 한껏 익어 홍단풍으로 얼굴 색깔이 바뀐다. 덩달아 하늘은 눈 시린 벽공이 되고 그를 닮은 강물은 벽수(碧水)가 된다.

그래서 ‘추수(秋水)는 공장천(共長天)으로 일색(一色)이다’(가을 강물은 하늘을 닮아 푸르다)는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명구절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가을엔 푸르름이 머리 위에 있어 청량함이 물씬하고, 봄엔 화사함이 길목을 지키기에 나그네의 발길이 더디곤 한다.

머리맡이 맑고 신선함이 감도는 이런 가을이면 그래 우리 시집 한 권 손에 들고 남도의 아무데나 한번쯤 가볼 일이다. 굳이 달빛이 속세를 털어버린 담양의 식영정이 아니어도 좋다. 갈대 온몸으로 노래하는 무등산 장불재도 좋거니와 원효사의 회암루에 앉아 추월을 맞는 것은 너무 사치로울까? 자고 나도 뭐 별난 게 없는 세상, 눈을 뜨면 한 눈 가득 얼룩이는 비리와 폭로, 치솟는 물가, 참 폭폭한 세상살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던져버리고 싶은 인생이란 사각 링의 타올도, 커오는 자식의 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노라면,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감이 야윈 허리를 세우게 하고, 주름으로 훈장을 다신 어머니의 이마와 물결처럼 얽은 손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수신호로 나를 붙잡는다. 참 힘든 것이 세상살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사는 것이 고통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그래 어차피 살 세상이라면 한바탕 멋지게 살아보리라는 야무진 다짐도 하루에도 몇 번씩 막무가내 밀려오는 크고 작은 세상의 파도에 부서지고 깨지고 하여 자꾸만 나약해지고 초라해진다. 그럴 때면 문득 하늘을 한 번 쳐다보자. 온통 푸른 하늘에 여리디 여린 새털구름이 한 조각 떠 있을 게다. 푸르름 천지에 새털구름 한 조각이라, 그래 그것이 그대의 인생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구름이 수 천 년 수 만 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하늘을 싫다고 떠났거나 정처 없는 여정을 포기한 적이 있었던가? 높이 떴지만 으스대는 말이 없고, 여리지만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줄기찬 항진의 의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질 않다. 세상엔 온갖 소리가 산다.

그 소리들은 존재의 확인이다. 살아 있음의 확인, 그 확인을 위해 문소리는 삐그덕, 자동차는 부르릉 끼이익, 소리를 낸다. 하지만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들도 참 많다. 아니 너무 많아 질식될 지경이다. 그 중에서도 번뇌란 놈은 가장 악질이다. 번뇌란 고통은 왜 생길까? 어떤 종교에서는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집착이라 했거니와 사는 것과 집착을 떼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생명체는 모두 집착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번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말이다. 그래서 사는 것이 곧 번뇌라는 개똥철학이 나왔을까? 잠깐, 사는 것이 번뇌라고 했거니와 그렇다면 번뇌 때문에 고민할 것이 아니질 않는가. 함께 하는 삶, 때론 번뇌 속에 자잘한 체면치레를 묻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번뇌를 핑계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동행의 상생법을 터득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보자. 우리 지역 천년 고도 영암에선 22일부터 24일까지 F1 코리아 국제 그랑프리가 열린다. 어둠을 헤치고 천지를 진동할 저 둔중한 굉음으로 버거운 번뇌, 불소통의 고통, 세상살이의 온갖 문제를 말끔하게 씻어버리자. F1의 한바탕 신명의 살풀이로 산뜻하고 청정한 전남 땅에 상하좌우가 소통하는 미래의 초석을 다져보자. 세계 속에 가장 청정하고 가장 잘 소통되는 금수강산 대한민국의 출발이 영암벌 굉음에서 탄생하리니, 사랑하는 그대여, 자네의 번뇌랑은 저 굉음 속에 씻어버리고, 거룩한 새 출발에 동참하시게나. 눈 시린 푸른 하늘 등잔불 삼아 시집 한 권 손에 들고….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