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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酒)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던가’ 하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입에 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니 술 공장 사장들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왕년(往年)에 향도기업 「B소주」의 광고에 모델이 되기도 하였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얼척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교수님 이미지가 기왕이면 ‘향토 술’의 애용을 권유하는데 적합할 것 같다며 적극적으로 교섭해 오는데 마음이 모질지 못한 내가 어떡할 것인가. 서울에서 전문 사진작가들이 내려와 나를 끌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광고사진을 찍어 대는데, 그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술은 왜 마실까? 술이 술을 청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한번 입에 대기만 하면 마치 술이 무슨 웬수나 되는 것처럼 마셔서 없애 버리려고 기를 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술은 ‘분위기(情趣)’로 마신다는 말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사실이다. 무언가 딱 부러지게는 아니어도 불현듯 지나간 옛날이 그리워진다거나, 아니면 하는 일 없이 보내버린 세월의 회한(回恨)이 엄습해 올 때 마시는 한잔 술이 진정한 의미의 술맛이 아닐까.

나처럼 술을 분위기로 마시는 사람이 어떤 때는 ‘멍청이 술’이 되어,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내가 30대 초반에 타이베이(臺北)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허구한 날을 강의실과 기숙사를 오가며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데도 중국 학생들을 따라 갈 수는 없고, 가족 생각에 울적해진 심사(心事)를 달래는것 또한 쉽지 않으니…. 술 생각은 이럴 때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울적한 마음 상태를 눈치 챈 슈에메이(學妹)들이 이럴 때는 술이라도 한잔 하시는게 좋다며 나를 끌고 간 곳이 다름 아닌 충효동로(忠孝東路)에 있는 뚱풔쥐(東波居)라는 유명한 맥주집이다.

‘동파(東波)의 집’이라는 이름의 맥주집이니, 술집치고는 운취가 있는 이름이지만, 전통주가 아닌 맥주집이라니 그다지 썩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집이었다.

동파(東波)가 누구인가. 북송(北宋)시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大文豪)인 소식(蘇軾)의 호가 동파가 아닌가.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1056년 진사(進士)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성질이 강직하여 자주 시정(時政)을 규탄한 끝에 투옥 당하기도 하였고 한때 하야하여 호북황주(湖北黃州)의 동파(棟波)에 한거(閑居)하며 울적한 심사를 시(詩)로 읊었던 사람이다. 문인(文人)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송대(宋代)문학의 최고봉으로 지목 받는 사람이 소동파이니 그를 추억하는 맥주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동파거(東波居)야 말로 비록 내놓는 술은 맥주였지만, 자연스럽게 송대(宋代)의 분위기에 빠져들 수 있는 곳이었다.

우선 출입구에 커다란 북(鼓)를 메달아 놓은 것 하며, 벽면 전체가 옛글(古字)이 빼꼼히 인쇄된 종이로 도배되어 있는 것과, 종업원들의 옷차림 또한 옛 복식 차림으로 손님들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벽면 빈곳 마다엔 이곳에 들른 손님들이 남긴 한시(漢詩)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 글귀들을 읊조려 보는 것 또한 나름대로의 정취에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다지 술을 즐겨하지 않는 나마져도 그곳의 분위기에 빠져 적지 않는 맥주를 마셨던 것을 보면 나는 역시 술에 있어서는 ‘분위기 파’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는 우리 일행을 환송하기 위해 모든 종업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현관 앞에 도열하여 만조우(慢走)!를 외치던 그 특이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이국(異國)에서의 향수를 뚱풔쥐에서의 맥주로 달래야 했던 젊은이가 어느덧 그것을 회상(回想)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덧없는 세월을 어찌할 것인가.

오수열 <조선대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