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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시인 김황원(金黃元)은 연광정(練光亭)에 올라가 그 경관에 취해 종일토록 글을 굽

다가 겨우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이란 한 구절만 짓고 기운이 빠져 뒤를대지 못한 채 엉엉 통곡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밭두덩 초라한 울타리 밑에 보일락말락한 노란 꽃들이 숨어서 피어있는 것을 보고 섬광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것이로구나!"하고 '소장서각점점화(小墻西脚點點華)'란 대구(對句)를 얻고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다.

점점산은 큰 것에 도취한 감흥이라해서 대흥(大興)이라 하고, 점점화는 조그마한 것에 도취한 감흥이라 해서 소흥(小興)이라 했다. 그래서 옛 시작법(詩作法)에 대흥에 소흥을 대구시키는 것이 한 유행을 이루어 큰 흥취만 찾을것이 아니라 작은 흥취도 아울러 찾는 것이 풍류가운데 하나였다.

서양에도 소흥과 맞먹는 '소황홀:(마이너 엑시터시)'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말은 헬렌켈러의 전기 속에 처음 나온다. 앞을 못보는 헬렌켈러 부인이 보송보송 병아리 한 마리를 두 손아귀에 담고 거기에서 감지한 촉감이 여느 모피에서 느꼈던 촉감과 다른만큼에서 생명의 심오한 의미를 알고 오금이 저리도록 기뻐했으며, 이 이상 체험을 그녀의 전기작가가 '소황홀'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 사는것도 그렇다. 임오군란이 실패하고 운현궁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은 유일한 소일이 묵란(墨蘭)이었다. 화선지에 난초를 치는거다. 좌절과 울분때문일까. 그의 난초는 연검(軟劍)처럼 서늘하고 예리했다. 초기 힘차고 날카로웠던 잎줄기는 차차 가늘고 부드러워진다.

체념한듯, 달관한 듯 바람에도 눕는다. 난초의 꽃말은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소동파는 '춘난은 미인과 같아서 꺾지 않아도 향기를 선사한다'고 했다. 어디 향기뿐이랴 그 눈들은 다시 날개돋친 흰나비떼가 되어/은하로 은하로 날아오른다'(서정주 '밤에 핀 난초꽃')고 했다.

이를 공자도 알아봤다. 주역의 계사에서 '둘이 한마음이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한마음으로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했다. 은근하면서도 굳은 우정을 의미하는 금란지교(金蘭之交)의 유래다. 공자가어(孔子家語)도 '깊은 산 속 난초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향기롭다'며 선비의 지절을 논한다.

일정한 생업이나 넉넉한 재산이 없어도 굿굿한 항심(恒心)이 있으면 바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군자(四君子)로 뭇 시인묵객으로부터 굄을 받았다.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 일경일화(一莖一花)는 남산골 딸깍발이의 정신이다. 가람 이병기도 시 '난초' 연작에서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고 칭송했다.

난은 계절도 가리지 않는다. 봄에는 춘란(春蘭)이요, 여름엔 건란(建蘭)이다. 가을엔 소심(素心)이고, 겨울엔 한란(寒蘭)이다. 지역도 안 가린다. 바람이 많은 제주에는 풍란(風蘭)이 있는가 하면, 흑산도에는 흑란(黑蘭), 울릉도는 울란(울蘭)이 있다. 그런데 기업과 관공서를 비롯 개업집이나 전시장마다 축하 난이 쌓인다.

특히 인사철인 요즘 기업과 관공서엔 난초가 성업이다.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크기도 적당하고, 모양새도 좋고, 운반하기도 편해서다. 하지만 사무실 난초는 1년을 못 버틴다. '물주기 3년'이라 했다. 야생의 성질을 사무실에선 전문가가 아니고는 다스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축하난의 덕목은 앞에서 말했듯이 은은한 가르침을 준다.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계절마다 피는 난초처럼 국민에게 향기를 줬으면 좋겠다. 한마음으로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하지 않던가.

고운석<시인. 무진주문화마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