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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말이 맞았다. 정말 추웠다. 덕유산 자락을 넘어오는 칼바람에 손이 얼어 메모는 물론이고 카메라 셔터 누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게 추운 덕유산으로 올라갔다. 덕유산 초입에 산자락을 타고 마을이 있었다.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통에 겨울이면 상수도가 필요 없다는 마을,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양악마을이다.

#옆집 마실 온 것처럼 놀다 가는 ‘정인승 기념관’

80여 호에 주민 180여 명, 그 중 초등학생만도 15명이나 되는 계북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알고 보니 고려시대에는 양악현(陽岳縣)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완만한 산자락을 타고 앉은 마을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태극기 휘날리는 2층 마을회관.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추위 속에 걷고 있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 드리는 것으로 양악마을과 인연이 시작됐다. 어디까지 가시느냐 물어도 저기, 저기만 하시더니 출발한 지 1분이 채 못 되어 다 왔다고 내리는 할머니.

할머니 말씀 듣고 반듯이 간 그 골목길 한번 묘하다. 거미줄처럼 서로 엉킨 골목길은 뱅뱅 돌아도 다시 그 길이었으니, 그렇게 몇 바퀴 돌다가 빠져 나오는데 웬 초현대식 건물이 있다. 한글학자 정인승 기념관이다. 한글보급에 평생을 바친 한글학자 정인승 박사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텅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웃거리는데 전시관 현관문이 열리면서 한 청년이 어서 들어오시라 한다. 지난 10월에 개관한 전시관을 관리하는 장규열(34)씨다. 군에서 내보낸 사람도 아니고 자원한 일이라니 이런 젊은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더구나 지금까지 산골마을을 수없이 다녔지만 청년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동안 아이들 몇이 와서 놀다 가고 아낙 몇도 왔다 간다. 마치 옆집 마실 온 모습이다.

#백제 시대 심방사터에 탑만 남아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담장마다 쌓아 놓은 크고 둥글둥글한 돌들이 눈에 띈다. “6·25난리 났을 때 집안에서 엎드려만 있으면 총알도 다 막았다”는 돌담이다.

골목에도, 대문 없는 집들에도 사람 그림자 찾기가 쉽지 않다. 경험으로 볼 때 이런 날은 마을회관에 가면 된다. 빨개진 귀를 감싸고 회관으로 가니 무슨 학교 건물처럼 잘도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이다. 방이 두 개인데 남녀로 나눠져 있다. 왼편은 남자 방, 오른편은 여자 방. 먼저 남자방으로 들어가니 마을 어르신 10여 명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다.

어서 따뜻한 곳으로 앉으라고들 한다. 마을 취재를 한다하니 모두가 나서서 한꺼번에 한 마디씩 하시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양악마을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옛날 양촌(陽村), 즉 양악현 고을터였다고 한다. 동헌터, 옥터, 향고터(세금으로 거둔 곡식 창고)라는 지명들이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것이 근거다. 어떤 분은 도사가 학을 기르며 살았다는 곳이어서 양학(養鶴)이라고 하던 것이 양악이 됐다고 한다.

앞산을 학산(鶴山)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로 부른다 하니 그도 그럴 듯하다.

양악마을은 덕유산을 넘으면 삼국시대에는 신라 땅이었고 백제와 경계지역이었던 탓에 격전지였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한다. 그곳에 가 보자 하니 “추워 죽겄는디 어딜 나가” 하며 손사래부터 친다.

그리고 백제시대에 마을 위쪽에 심방사(尋訪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말에 솔깃하여 더 물으니 저기 소(沼) 뒤로 가라한다. 거기에 탑이 있다고. 이 동네는 참 볼 것도 많구나, 제대로 왔구나 싶다. 마을 입구에서 만나 1분 정도 차를 태워드린 할머니가 덕유산 자락에서 내려온 삼신할미가 아닌가 싶어져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준 상이라고 했어!” 마을 어르신들 상 자랑

각자 자랑거리들 있는 대로 내놓으시라 하니 김양운(74)씨가 대뜸 큰 상 받은 게 있다 한다. “해병대 출신으로 계북면 예비군 중대 양악소대장을 역임했다”는 이승우(71)씨가 먼저 묻는다. 누구한테서 받은 거냐고. 김양운씨 왈, “박정희 대통령이 마을 뒤에 방죽 만들 때 수고했다고 준 상장이여.”

진짜 대통령상이냐고, 내무부장관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전직 양악소대장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되묻는다.

“뭔 상, 면장이 준 상 말여?” 양악소대장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겄고, 그때 면장이 박정희 대통령이 준 상이라고 했어!” 앞 이빨이 몇 개 남지 않은 김양운씨는 여전히 그 상이 자랑거리다. 그 상장 보러 이따 같이 댁에 가 보자 하고 옆방의 여자방으로 옮긴다.

방으로 들어서니 고소한 냄새가 난다. 10여 명의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는데 한 패는 고도리에 여념이 없다. 낯선 외지인을 반기는 쪽은 머리가 허연 할머니들이다. 어서 앉으라며 먼저 손부터 잡아당긴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하니 아주머니 한 분이 컵라면을 가져와 벌써 물을 붓는다. 인심이 좋은 동네라 하니 김치까지 내온다.

난리(육이오)가 났을 때 산사람들 땜에 못 살고 피난 갔다가 마을로 오면 훈짐(김)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볕 양(陽)’, 양촌이었을까. 덕유산 칼바람이 휘돌아도 마을 위로 따뜻한 볕이 있는 양촌, 양악 말이다. 김치에 든 상큼한 맛을 내는 나물이 있어 물으니 ‘고수’라는 나물인데 여기서만 먹는 나물인데 씨를 줄 테니 가져가 심어 보라 한다.

#꽁꽁 얼어 붙은 토옥동 계곡에 용연정·용소 절경

마을 뒤 계곡에 꼭 가보라는 말에 칼바람 맞으며 가니 아니나 다를까 주위 경관이 절경이다. 기암괴석 위에 있는 정자는 용연정(龍淵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절벽 아래 연못은 물어볼 것도 없이 용소(龍沼)겠다. 덕유산 자락 토옥동 계곡은 꽁꽁 얼어 있다. 용연정 앞 용소도 꽁꽁 얼었다.

용소는 명주실꾸리 세 개를 풀 정도로 소가 깊으며, 이웃 면인 안성면에 있는 칠연소와 통해 있다며 허풍을 떠는 아이는 얼음을 밟으며 뛰어다닌다. 용이 못된 이무기 한 마리가 용소에 살았는데 소를 매어두면 안 된다고 하여 지금도 용소 주위엔 소를 매지 않는다 한다. 초록이 짙어지면 참으로 절경이겠구나 싶다. 인심 좋고 산수 좋으니 다시 한번 와야겠다.

용연정 옆에 문화재로 지정된 양악탑이 있다. 원래는 심연사라는 곳, 지금도 탑전머리라 부르는 곳에 있던 탑인데 농지정리를 하면서 1973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탑을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애지중지한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못생기고 볼품 없어 보이는 작은 5층탑이 천년 넘는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약속대로 대통령 상장을 받았다는 김양운씨 집을 찾아가니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상장을 꺼내 놓는데 보니 박정희가 준 상장이 아니고 1973년도에 계북면장이 준 상장이다.

당시 밥그릇 하나 부상으로 받았다는데 여전히 대통령상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워한다. 아직 3명의 자식을 출가시켜야 하니 할 일이 많다며 “사는 게 그런 거지”하고 이빨 빠진 모습으로 웃는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서서 상장을 들고 웃는 김씨의 모습이 군불만큼이나 따뜻하다.

고수 나물 씨 준다는 할머니 집에 가니 비닐봉투에 싼 씨를 준다. 돌아오는 봄에 그냥 뿌리기만 하면 잘 자랄 거라 한다. 내년에는 향기 좋은 나물을 많이 맛보겠다. 가는 길은 멀어도 볕처럼 따뜻한 마을 양촌을 기억하며.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