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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주천면 호곡 마을. 입구엔 여느 마을처럼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에 노란 은행나무와 함께 최근에 지은 듯한 동각(洞閣)이 있다. 차를 세우고 마을로 들어서는데 마침 뒷짐을 진 할아버지 한 분이 내려오신다. 운동 삼아 산책 가는 중이라는 할아버지는 동각에 앉자마다 말실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리 동네가 동쪽에 있는 호랭이여. 아조 명당이랑게

“…아, 말도 말어. 우리 동네가 어뜬 동넨디. 호곡(虎谷)이여, 호곡. 원래는 ‘범실’이라고 했어. 우리 동네가 호랭이 같다고 그랴, 그래서 범실이래. 아, 호랭이가 많아서 범실이 아니고, 들어봐. 내가 갈쳐 줄텐께. 호랭이가 지리산 천왕봉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다가 요 건너 마을 앞에 사자봉이 있는디, 거기까지 왔는갑서. 근디 그 호랭이란 놈이 그 사자봉 땜에 더 이상 못 내려오고 가만히 엎드려 있다고 그래. 그래서 그 쪽 동네는 복호여. 엎드릴 복(伏)자에 범 호(虎)자를 써서 복호라고 혀. 요 앞 동네제. 한번 봐봐. 아, 사자같이 생겼드라고? 하, 그 양반, 똑바로 한번 봐봐. 내 눈에는 분명히 사자같이 생겼그마는. 여기 땅이 다 그런 것이여. 그렇게 생겼다고 허고 봐야제, 글안흐면 안 보여.

뭐이라고? 왜 동각 현판이 동호정(東虎亭)이냐고? 동쪽에 있는 호랭이란 말이제. 그 연원을 볼짝시면 원래 산이 많은 지리산 남원에는 네 곳의 호랭이 명당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여. 그 첫째가 저기 저, 서쪽에 있는 곳이라는데.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겄고. 글고 두 번째가 우리 동네인디, 바로 범실이제. 그래서 우리 동네가 아조 명당이랑게. 그래서 무쟈게 살기가 좋은 동넨디 말여.

나는 양가(梁家)요, 남원 양(梁)가. 근디 우리 범실에서는 양가가 벌로 없어. 원래는 300년 전에 박씨들이 입향해서 살았다고들 혀. 그 뒤로 조씨들이 와서 살았고, 지금은 노씨들이 많이 사는디. 옛날 같지 않게 다른 성받이들이 많이들 들어서 살고 있제. 그래도 아적까정 큰 말썽 한번 없이 잘 살고 있제. 원체 우리 밤실이 좋은 게로. 히히. 나가 밤실 토백이요. 올해 일흔여덟인디 아적까정 큰 일이 없었제라. 하긴 뭐 육이오 전쟁 같은 난리통에도 우리 밤실은 끄덕이 없었제.

글고 봉께, 그 때만 생각흐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해. 남원 시내는 비양기로 폭격을 맞아 갖고 난리가 아니었제. 나도 진짜로 쎅쎅거리며 나는 폭격기를 봤는디 진짜로 겁나등마. 그래도 우리 동네는 끄떡없었어. 피난? 우리는 안 갔어. 범실에서 피난 간 사람은 없었어. 남원시내 사는 사람들이 범실로 피난을 왔제. 그때는 참말로 동네가 버글버글했제.

뭐요? 뭘 묵고 살았냐고? 아, 말해서 뭣해! 땅 파 묵고 살았제. 농사꾼이 뭐 별 거 있었겄어? 농사짓고 살았제. 우리 동네가 산속에 있는 것 같아도 제법 논농사가 많은 편이요. 저 앞을 보믄 알 거 아니요. 농사 짓으면서 자식놈덜 시집 보내고 장가도 보내고 했지라. 근디 생각흐면 징흔 세월을 살았어. 정령치 쪽으로 들어가 나무 해다가 남원장에 내다 팔고 했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

뒷산? 월봉이라고 해. 달월(月)자를 써서 말여. 뭐? 동네에 여자가 많겄다고? 아따 글고 봉께 많이 알구마이. 맞어. 우리 동네는 여자들이 훨씬 많제이. 영감은 죽고 할마니만 사는 디가 솔찮허제….”

동네를 돌아 다녀봐도 남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들만 마지막 가을걷이에 한창이다. 옥상에서 콩 타작을 하는 할머니의 도리깨질이 지리산 자락처럼 힘차다. 이 땅을 살아가는 건강한 삶이다.

주천면 소재지에 있는 ‘꽃잔치 유치원’에 다닌다는 희진이는 마을에 있는 유일한 아이다. 물론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다. 희진이의 부모는 서울로 돈벌러 갔다 한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아무 걱정하지 마라” 웃기는 얼굴 미륵정

“…젊은 사람이 없어. 밤실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제만인디 거기도 육십이 다 되았어. 글고 다 칠십이 넘었제. 이장도 칠십이 넘었는디, 이장 흘 사람이 없으니 그 나이에도 이장질을 허고 있어. 다른 디는 뭐 칠십 줄을 넘긴 사람은 이장을 못흐게 흔다고 헙디다만 사람이 있어야제. 젊어도 흘라고도 안해. 일 흐로 다닌디 이장일 흘 시간이나 있겄어?

뭐? 석장승? 석장승이 아니고 미륵정이여. 우리는 그렇게 불러. 미륵님이 우리 동네를 지켜주제. 저렇게 마을 앞에 떠억 버티고 서 있는디 어떻게 우리 동네가 마가 끼겄어? 가서 봐서 알겄지만 미륵정이 있는 곳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요. 글고 남원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허제. 그 건너가 바로 복호라고 허. 아까 얘기했든. 김아무개 꿈에 미륵님이 나타나서는 자기헌테 제사를 지내주믄 부자로 맹글어 주겄다 해서 칠월칠석이믄 제사를 지내는디 지금도 지내는가 몰르겄네. 뭐? 부자가 되었냐고? 아,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게 치성을 들이는디 부자가 되고도 남겄제?

나가 공병부대 출신인디 휴가 갔다가 집에 오믄서 보믄 미륵정부터 보여. 글믄 얼매나 반가운지 몰라. 정령치로 나무허러 갔다가 올때믄 거기는 쉬는 장소여. 거기에서 나무 따묵기도 했제. 쎄가 나게 고생해서 나무해서 지고 왔다가 저기서 뺏긴 놈은 환장했을 것이여. 허허. 한번 가 볼랑가?

근디 요세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많이 아프단 말이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디 말여. 저 새로 난 도로 땜이여. 저렇게 큰 도로를 맹글어 갖고 미륵님이랑 우리 동네랑 딱 갈라 놔불었제. 글고 사자봉에 있는 있는 호랭이가 우리 동네로 못 와. 저렇게 큰 도로가 떡 가로막고 있으니 올 수가 있어야제. 그렁께 사람들이 아픈가벼….”

범실 마을을 벗어나 주천면 소재지 쪽으로 가다보면 제법 넓은 벌판이 펼쳐진다. 정령치가 지척이다. 남원시내에서 주천면으로 가는 730번 지방도 아래에 숨은 듯이 미륵정이 서 있다.

270㎝의 제법 큰 석장승은 목이 없는 원숭이 얼굴에 패랭이 쓰고 노래를 하는 듯한 모습이 아주 해학적이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사람들은 물론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모습이다. 새로 생긴 도로가 마을과 갈라놓았지만 미륵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 웃기는 얼굴로 “아무 걱정하지 마라”한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