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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 사회는 '길'을 만드는 유행이 한창이다. 별별 이름의 길이 만들어지면서 되레 환경보전에 해는 안 되는지 걱정이다. 누구나 다 하는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우리만의 자원 개발, 곧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정자 순례단 같은 것 하나 발족해보면 어떤가? 정자라 했거니와 이번엔 호가정(浩歌亭)을 찾아간다.

호가정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 마곡마을에 있는데 설강(雪江) 유사(柳泗)가 만년에 은둔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유사는 자를 중락(仲洛), 호는 설강이라 했는데 서산인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삼사(三司)와 승지(承旨) 등을 거쳤으나 권신을 배척하였다가 무고를 당해 퇴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구강 위에 이 정자를 짓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이언적, 이황 등과 교유가 두터웠던 이 고장의 명유(名儒)로 '해동명현록'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 문정공(文靖公) 백유(伯濡) 등 선조의 대를 이어 문장을 잘한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았다. 백유는 그의 4대조인데 문자(文字) 시호(諡號)를 받을 만큼 문장에 이름이 있었던 인물로 사료된다.

정자의 주인 유사의 시를 감상해보자.

石枕松陰轉 돌베개 베고 누운 곳 솔 그림자 들어오고/風欄野色회 난간에 부는 바람 들 빛을 몰아 오네

寒江明月裏 맑은 강물 속 밝은 달빛 가르며 /裝雪小舟來 눈 맞은 듯 하얀 모습 작은 배 떠 오네

<호가정원운>이다. 주인 유사의 시인데 처음 두 줄은 정자에서 강호 자연을 즐기는 한가한 주인의 모습을 그렸다. 정자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해 따라 그 그림자가 정자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낭만적인 경치를 말함으로써 서정을 유발시킨 뒤 둘째 줄에 가서는 정자 난간으로 들 빛을 몰아오는 시원한 바람을 등장시켜 서정을 고조시켰다.

정자와 솔, 그리고 들녘과 바람 등 강호의 거물들을 총 동원하여 전원의 분위기를 한껏 부풀렸다. 고조된 서정은 마지막 줄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뜻의 장설(裝雪) 두 글자는 이 시의 눈 곧 시안(詩眼)이다.

맑은 강물과 거기에 비치는 밝은 달빛을 모두 하얀 눈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곳을 지나는 작은 배는 눈 속을 가르며 눈을 맞고 있다는 상상의 세계인 의경(意境)이 열린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의 발현이다.

下有九江上有天 굽어보니 구강이요 쳐다보니 하늘인데/老夫無事倚風煙 일 없는 늙은 몸이 자연을 의지하네

奔忙往跡何心計 분주했던 지난 시절 생각하면 무엇하랴/晩契堪憐岸鳥眠 늦게 만난 물새 따라 졸기를 자주하네

역시 <호가정원운>이다. 주인은 앞의 다섯 자 시와 여기의 일곱 자 시 두 편을 지은 것 같다.

첫째 줄에서는 정자의 위치와 경계를 말한 것으로 시상을 일으킨 뒤 두 번째 줄에 이르러 정자 주인이 자연과 더불어 산다고 함으로써 강호의 객이 아니라 주인임을 자랑하고 있다. 셋째 줄에서는 세속과는 거리를 둔 정자 주인의 초연한 모습을 말했는데 끝에 이르러 새와 더불어 졸기를 같이 한다고 하는 등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으로써 귀거래의 완성, 물아가 일체된 의경을 창출해 보였다.

가을이다. 들녘에선 나락 익은 냄새가 콧등을 사치롭게 단장하고 논과 밭에서는 온갖 과실들이 오곡과 더불어 모처럼의 알몸 쇼를 거침없이 연출하고 있다. 장마와 잦은 비로 걱정이 많았던 우리네 얼굴과 가슴에 그래도 웃음 한 번 짓게 해주는 대자연의 수혜 앞에 새삼 고개를 떨군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언가 막힌 기분이 들 때면 호가정을 찾아보자. 탁트인 나주벌과 아름다운 자태의 강물이 '그래그래' 하면서 우리들 여린 가슴 다독여 줄테니까. 잊어버릴 만하면 표표히 지나가면서 존재의 의의를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기차의 행진에서 분명 살고 싶은 에너지를 느낄 것이다.

落日山明水映天 석양에 물든 산 모습 물에 비칠 때/隔溪孤店起炊煙 시냇가 건너 마을에선 밥 짓는 연기나네

松林石등淸如洗 솔 숲의 돌길은 씻은 듯 깨끗한데/坐對沙邊白鷺眠 마주한 모래톱의 백로 졸음을 짓네

玉環飛燕本殊姿 달 가를 나는 제비 자태가 아름답고/南國名亭各自奇 남쪽의 이름 난 정자 각각이 기이하다

면仰超然風詠靜 우뚝 솟은 면앙정 고요한 풍암정/浩歌還可賦新詩 호탕한 노래 뒤엔 시 지어 읊는 소리

이 시는 동악(東岳) 이안눌(李安訥)의 <제호가정(題浩歌亭)>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안눌(1541~1584)은 덕수인으로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데 호를 동악, 시호를 문혜(文惠)라고 했다. 광해군 때 예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괄의 난을 방관하였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 아버지 정원군의 시호를 받아가지고 와서는 예조판서가 되었다.

시와 서예를 잘 하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우리 지역을 기행한 후'담주록(潭州錄)'을 남겼다. 그것은 우리 지역 곳곳에 대한 시문으로 가득 차 있어 한시 호남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서에'동악집'이 있다.

동악은 이 시에 대해 유수재순(柳秀才珣)을 위하여 지은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남쪽 고을에는 면앙정, 풍영정, 호가정 등 세 정자가 이름 높은데 이 셋 가운데 으뜸은 말한 사람마다 달라서 서로 달리 으뜸이라고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먼저 앞의 두 줄에서는 정자에서 둘러본 경을 말함으로써 시상을 일으켰다. 이어 함련에서는 깨끗한 솔 숲의 돌길이라는 정적인 모습과 모래톱에서 졸음 짓는 백로의 동적 이미지를 대비하여 대구를 삼았다. 이어 경련에 이르러선 달 가를 나는 이름다운 제비의 역동성과 남쪽 고을에 이름 난 기이한 정자의 정적인 모습의 대비를 대구함으로써 서정의 극대화를 가져왔다.

이어 이 고장에서 이름 난 면앙정과 풍영정의 이미지를 우뚝 솟음과 고요함이라고 단적으로 말한 뒤 호가정은 호탕한 노래를 부르다가 또 새로 시가 완성 되면 그것을 읊조리기도 하는 곳이라면서 은근히 호가정이 으뜸이라는 뜻을 내비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했다.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ㆍ전남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