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프린트하기

아직은 이른데도 선뜩 찬바람이 일어 낙엽 휩쓸리는 소리가 스산한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뭘 했나 싶은데 벌써 10월이라니 참 무상한 세월이다. 이렇게 청량한 공기가 영혼을 맑히는 때를 당하면 평소와는 달리 거룩한 생각이 들기도 하거니와 그래서들 이맘 때는 추모 행사를 벌이곤 하는가 보다.

포충사.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7호인데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제봉 고경명, 그의 큰 아들로서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진주성 싸움에 나아가 순국한 준봉 고종후, 제봉의 둘째 아들로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순절한 학봉 고인후, 그리고 제봉과 함께 순절한 유팽노 장군과 안영 장군 등 5위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포충사는 1601년에 건립하여 1603년에 사액(국가에서 이름을 내려준 사당)을 받았는데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71년) 때에도 훼철되지 아니한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선현 제사 공간이다. 여기에는 사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충효당, 전사청, 청사영당(제봉 고경명의 6째 아들 고용후를 모신 곳), 고직사 등 건물이 있다

수목이 아름답게 우거진 고즈넉한 공간, 오늘날 포충사는 웨딩 포토 장소로 각광받는다. 바람직한 일이다. 결혼할 선남선녀가 충과 열의 정기가 서린 사당을 찾아와 그 곳의 기운을 받고 그 곳에 담긴 정신을 체득한다면 장차 그들이 잉태해 낼 후손을 기대해 볼만하지 않는가? 아, 희망찬 대한의 미래가 보이는 듯….

포충사에 가거든 "충노 봉이. 귀인지비"를 찾아볼 지어다. 제봉의 시신과 그의 아들 학봉의 시신을 거두었던 고씨 집안의 노비 두 사람, 어디 그 뿐인가? 큰 아들 준봉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던 그들, 그 두 사람은 비록 신분은 노비였으나 생각은 그 어느 양반에 못지않았으니 사람의 귀하고 천함이 어찌 지위와 신분, 물질에 달려 있으랴?

은혜를 배신으로 밥 먹듯 하고, 실리와 명리에 정의와 양심을 저버린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판을 치고 득세한 오늘날, 봉이와 귀인의 나지막한 비석은 어떤 생각을 할지….

포충사에는 "호남순국열사비"도 있다. 고광순, 황현 등 한말 호남 의병 22인에 대한 순국의 내용을 담은 비석이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귀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오로지 조국 위해 산화해 갔던 님들. 조국이 무엇이며 왜 정의와 충성이 필요한지 몰지각한 정치배들은 꼭 참배해야 할 필수 공간이라 생각된다.

콩 심은 데 콩나는 법, 광주 출신 제봉은 기묘명현 하천 고운의 손자인데 그의 두 아들은 임진왜란 때 순절했고, 넷째 아들 순후는 정묘호란 때 의병장을 지냈으며, 13세손 광순은 한말 '불원복(不遠復: 머잖아 광복을 하리라)' 이라는 태극기를 만들어 일제에 대항하다가 연곡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의병장이다.

역사는 만약이란 게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제봉이 만약 동래부사에서 파직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어떻게 대처했을까? 동래부사의 비겁한 행동이란 부끄러운 역사적 기록이 없었을 것이니 흥미로운 가상이다.

제봉은 20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1세에 울산 김씨와 혼인하여 6남 2녀를 두었다. 26세 때는 문과에 장원하고 성균관 전적, 형조좌랑 등을 지낸 뒤 사가독서한 뒤 29세 홍문관 교리가 되었는데 이 때 명종 임금의 62폭 병풍에 시를 짓는 영광을 누렸다.

30세 때에는 별시의 고시관이 되어 송강 정철을 장원으로 뽑았는데 그 이유로 나중에 59세의 나이에 동래부사에서 파직하게 된다. 31세에 울산군수가 되었는데 그만 두고 광주 고향으로 돌아와 49세 영암군수가 되기까지 약 19년 간 유유자적하면서 수많은 주옥 같은 시문을 남겼다.

무등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서석록'은 50세 때 남긴 글이다. 49세에서 59세 동래부사 시절까지 제 2의 벼슬살이를 했던 제봉,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60세의 노구였다. 몸은 비록 늙었으되 조국 향한 충렬은 뜨거웠던 제봉, 그는 전국 최초 거도적 연합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담양 추성관에서 기병하여 여러 공을 세운 뒤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

순절 직전 유팽로와 안영 등 부장들이 보여준 대장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 그리고 대장이 부장에게 명령한 무한한 사랑, 하지만 아무도 적진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내 함께 산화하여 조국의 젖줄인 호남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남긴 그 넋들, 아, 전장에 핀 아름답고 의로운 꽃이도다, 오늘처럼 대지가 풍요 속에 평화롭고 하늘 청량한 날엔 님들 생각 너무나 끈하외다.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ㆍ광주예총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