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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말간 얼굴에 가을 홍엽이 알록달록한 물을 들인다. 내 마음도 덩달아 가을이 되어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하고 싶어진다. 문득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고 당부했던 다산의 말이 떠오른다.

誅茅結舍得純休 띠 풀을 베고 지은 집 쉬기 좋은데

四顧靑山總豁愁 사방의 푸른 산이 근심을 덜어주네

靜夜開窓迎皓月 밤이면 문을 열고 밝은 달을 맞이하고

暮春成服向芳洲 늦은 봄날 새 옷 입고 방주로 향하네

看書足供賓朋話 책을 읽어 친구들과 정화를 주고받고

投轄非關盃酒留 비녀장과 빗장을 빼고 실컷 마셔본다네

更有心期相契許 또 다시 모이자고 마음으로 약속하는데

黃花綠竹耐深秋 황국과 녹죽만이 늦가을을 견디어 섰네

차풍영정운(次風詠亭韻)인데 미암 유희춘의 시이다. 유희춘(柳希春 1513~1577)의 자는 인중(仁仲), 호를 미암(眉岩), 인재(寅齋), 연계(漣溪) 등이라 했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으로 선산인 유계린(柳桂麟)의 둘째 아들이다. 부인은 여류시인으로 이름 높은 송덕봉(宋德峯)인데 고향이 담양이어서 만년에 그 곳에 머물러 살았다.

미암은 '표해록'으로 유명한 금남 최부의 외손으로 그는 외조부 금남의 '표해록'을 출간하여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암은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 신재 최산두와 모재 김안국 등에게 가르침을 받아 1537년(중종6)에 생원시, 그 다음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 등을 거쳤다.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는데 양재역 벽서사건(1547)이 일어나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옮겨져 19년 간이나 억류 생활을 했다. 종성에서는 밤낮으로 경서를 암송하는 등 학문에 몰두하여 그 곳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선조가 즉위하자(1567) 유배에서 풀려나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구결과 언해를 만드는 등 유학과 우리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구결언해에 참여하여'대학'을 완성했으나'논어'는 끝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미암은 학문이 높고 절의가 있어 당세에 명망이 높았다.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이 고장 학풍 조성과 선비문화 정착, 그리고 문학 발전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인후와는 특히 다정하였기에 그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특히 그의 '미암일기'는 1567년(선조 즉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 간의 기록으로 조정의 공적인 일에서부터 개인의 사사로운 일까지 매일 경험한 일, 보고 들은 일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선조 초년의 조정의 대소 사건, 중앙과 지방 관아의 이런 저런 일들, 관리들의 내면생활은 물론 사회의 경제 상태, 지방의 풍속과 문화 및 물산 등에 대한 제반 사정을 알려주는 매우 귀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일기는 조선시대 중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사 등의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사료가 소실된 바람에 '선조실록'의 편찬에 있어 큰 애로를 겪었는데 다행히 기대승의 '논사록', 이이의 '석담일기' 등과 함께 실록 작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미암의 저서로는 '국조유선록', '속몽구', '역대요록', '신증유합', '미암일기', '미암집' 등이 전한다. 미암의 아버지 유계린은 김종직의 문하인 최부의 제자였기에 우리 지역 초창기 사림 문화 형성에서 크게 기여했다. 미암의 형 유성춘은 윤구, 최산두와 더불어 호남 삼걸로 칭송된다.

위의 시는 아무리 즐겼어도 아쉬움과 미련은 남는 법, 다정한 친구들과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만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말을 하여 세월의 덧없음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황국과 녹죽만은 굳건한 기개로 늦가을을 견딘다고 하여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겼다. 하늘거리는 억새들이 온몸으로 가을을 붙들고 있다. 머잖아 찬 서리 드세지면 억새의 일생은 끝이 날텐데 누가 있어 그의 역사를 기록해 줄지…. (미암일기, 보물 제 260호)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ㆍ광주예총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