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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북에서 남으로 움직이고 있다. 추위를 아는 것들은 모두 단풍을 따라 남으로 둥지를 틀기 마련이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왜냐하면 자연을 닮았으니까.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그 곳 자연이 사람과 하나 된 곳, 강진 칠량 봉황과 보성 미력에서 옹기를 만나보자. 옹(甕, 瓮)은 독을 말한다. 그러니까 옹기는 독을 일컫는 말로써 흙으로 만들어 잿물을 바르지 않고 구은 것은 질그릇이라 하고, 광택이 나도록 잿물을 발라 구운 것은 오지그릇이라 했다.

사람이 태어나 제일 먼저 접하는 것은 엄마 젖이라고 한다. 새 생명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나 치아가 생기면 밥을 먹는데 그 밥은 다름 아닌 엄마의 젖을 닮은 그릇에 담아 먹었다. 아, 그래서 인류가 가장 먼저 만든 그릇은 엄마의 젖을 닮은 사발 모양 이었음이 이해된다.

그리고 성년이 되면 밥을 먹고 난 뒤 차를 마셨는데 찻잔 역시 엄마의 젖을 닮은 모양이었고 생을 마친 뒤엔 엄마의 젖을 닮은 큰 독에 넣어져 땅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인류와 그릇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든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등의 말은 차치하고라도….

생활 용기였던 옹기는 자기와 쌍벽을 이룬 민간의 그릇에서 전 국민의 그릇으로 확대, 전승되어 우리의 소중한 문화의 하나가 되었다.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은 뒤 천연 자연 재료인 잿물이라는 옷을 입힌 것은 고려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 이전엔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웠기 때문에 문양이나 광택 등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조선 시대 이후 잿물이라는 일종의 유약(藥柚)을 씀으로써 광택 등 외양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임란 이후엔 산화연으로 제조한 연유를 배합한 광명단을 사용하여 옹기 본래의 통기성, 자연 환원성, 저장성 등에 손상을 입히게 되었다. 광명단에 납성분이 들어 있어 견고성이나 경제성엔 도움을 줄지 모르나 위생상에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에 옹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흩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지금은 황갈색 유약을 입힌 질그릇을 통칭하는 것으로 옹기란 말이 쓰이지만 옹기는 고구려 안악 3호분 등에서 독 모양의 그릇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유구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 한 우리 문화의 한 피붙이임에 틀림없다.

견고하고 반영구적이며 가볍다는 슬로건을 든 플라스틱과 스텐리스 등에 밀려 한 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옹기는 최근 이른바 웰빙 시대를 맞아 다시 각광 받고 있다. 그 이유는 통기성과 방부성 그리고 자연 환원성 등이다. 소위 숨을 쉬는 그릇이란 말이 바로 통기성이다. 옹기는 통기를 하여 독안에 들어 있는 음식의 나쁜 성분을 밖으로 배출시킨다. 아,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들은 해질녘이면 꼭 장독대로 달려가 장독들을 닦아내곤 함으로써 통기성을 원활하게 하였던 것이다.

옹기의 장점 중 하나는 자연 환원성이다.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자연으로 다시 환원하는 것이 상례일진대 옹기는 깨어지면 얼마가지 않아 다시 자연의 흙 상태로 환원한다. 살아서는 인간을 위해 저장과 보관 그리고 위생의 소임을 다 하고 죽어선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 창조의 모태가 된다.

장독대는 한 집안의 가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였으며 주인과 머슴 등 대소 집안 식구들의 식 생활 보물 창고였던 곳이었다. 지금은 민속촌이나 특별한 장소에나 있는 것이되었지만 이전엔 사연도 많고 애환도 가득 담긴 여성 문화사 창조의 한 무대였다.

지금 그 무대의 주인공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자연으로 환원하였거나 인생 황혼의 마지막 무대를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숱한 애증의 설화(舌禍) 잔뜩 남기고 이젠 아련한 추억의 회상으로 남겨진 장독대, 그 장독대의 주인공은 옹기였다. 장독대란 무슨 말인가? 장과 독 그리고 대의 결합어가 그것이라면 장(醬)은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음식 제조상 필수불가결한 양념을 말한다. 아니면 갈무리 한다(藏)는 의미로서 장은 쌀이나 보리, 감자 고구마 등의 식량 저장이나 종자 등을 보관한다는 것이고, 독은 옹기를 지칭하며 대는 땅보다는 약간 높은 곳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결국 장독대는 인류 생존의 필수품을 보관 또는 저장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독대의 주인공인 옹기, 그 옹기를 찾아 강진 칠량 봉황이나 보성 미력을 찾아 자기 품에 안긴 것들과 온 몸으로 소통하려 애쓰는 옹기의 봉사정신과 낙엽이 자연으로 환원하여 내년 봄 새싹을 준비하듯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환원하는 옹기의 겸손을 느껴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96호, 미력옹기)

최한선<전남도립대 교수ㆍ광주예총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