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프린트하기

풀들이 혹은 나무들이 최근 한창 꽃을 피웠다가 지고 있다.

하지만 이름만 생각해도 마음 저 깊은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당장 초록이 가득한 산야로 향하고 싶어진다.

그런 자연으로의 일탈은 생각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나만그런지 모르겠다.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증세는 꽤 되었다. 봄과 함께 시작되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봄을 타는가 싶기도 한데, 초여름 문턱에선지 나무에 돋아난 잎새는 푸르름을 더 하고, 가지끝을 뚫고 나온 새순들은 눈으로 마음으로 쏙쏙 들어오고, 땅위로 쑥 올라와 꼬깃꼬깃 동그래 말려 있던 줄기와 잎새를 펼쳐 내기 시작한 꿩고비나 청나래고사리를 보면 그 생명의 대견함이 뭉클 감동스럽기도 하다.

엊그제의 현란한 개화에 이어 하루 아침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들이 만들어 낸 꽃비, 여기에 촉촉이 내려 앉은 초여름의 비까지 보태면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말하고 있자니 사춘기에 갓 접어든듯한 감상이 유치하기 그지없다 싶기도 하지만 난 그다지 싫지 않다.

가능하면 이 느낌을 세상에 마모되어 둔탁해지지 않도록 잘 지속하고 싶다.

그런 자연의 생명들과 공유하는 시간들의 의미가 딱 꼬집어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자연과의 고유를 할 수 없는 이들이 안타갑기도 하다.

한데 난 지난 주에 시간이 좀 나 밤꽃이 피어있는 장성의 한 마을을 찾았다.

다른사람은 별로 오지 않는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이 태어난 터인 백화정에서 혼자 반나절동안이나 놀았다.

선생은 어디 가셨는지 안 계시고, 할 일이 별로 없는 건달 후학(後學)만 여기 혼자 서성거리면서 멀리 보이는 필봉만 탐을 내고 있구나! 백가지 꽃이 핀다는 백화정의 텃밭 귀퉁이에는 아주 오래된 밤나무 한 그루 있었고, 밑둥이 갈라진 고목의 가지마다 하얀색의 밤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런데 이 밤꽃의 향기는 맡을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왜 이렇게도 독특하단 말인가!

꽃의 향기라면 당연히 달콤하고 감미로워야 할 텐데, 늦게 6월에야 피기때문인지 밤꽃 향기는 비릿하면서도 기분이 썩 좋은 향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흔히 남자의 정액 냄새 같다고들 한다.

치자꽃 향기는 남국의 싱그러우면서도 깔끔한 향기라면, 라일락은 감미롭고 낭만적인 향기이고, 장미의 향은 청춘남녀의 춘심(春心)을 발동시키는 향기이고, 연꽃의 연향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향기이다.

그러나 라일락보다도, 장미향보다도 더 강하게 와 닿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혼자 된 과부라고 한다.

내가 딱 꼬집어 어떤것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자연과의 공유를 할 수 없는 이들이 안타까운것처럼 과부는 남자 정액냄새 같은 밤꽃향을 품지 못해 안타깝게 운다. 속설에 의하면 밤꽃향은 과부로하여금 잠못들게 하는 향이라고 한다.

강한 양기가 뭉쳐있는 향이기 때문이다.

양기가 뭉치면 비릿해진다.

단전호흡을 하는 수련가들은 밤꽃향을 맡으면 하단전으로 기운이 쑥 들어와 축적된다고 한다.

과부가 몸살나는 가장 영양가 있는 향이기 때문이다.

단학(丹學)에서는 3가지 보물은 삼보를 강조한다.

하단전의 정(精), 중단전의 기(氣), 상단정의 신(紳)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신이충만하면 잠을 3~4시간만 자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동의보감’의 앞부분에서는 ‘정·기·신’ 삼보를 보강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삼보가 충만하면 무병장수 할 수 밖에 없다.

삼보의 첫 단추는 정을 보강하는 방법인데, 이 맘때쯤 그향기를 진동시키는 밤나무 아래에 1~2시간 앉아서 야릇한 밤꽃 양기를 흠뻑 맡는것도 전통적인 양생법의 하나이다.

고운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