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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엘 다녀왔다. 말이 해외여행이지 맑은 날에는 부산 해운대에서 아스라이 보인다는 곳이고, 승선 시간도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으니 제주도 다녀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면적 708㎢에 인구 3만5천명의 조그마한 섬이라지만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곳곳을 둘러보려니 무척 쫓기는 여정이었다. 특히 동양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쓰시마는 진즉부터 찾고 싶은 곳이었던 만큼 둘러볼 곳이 적지 않았다.

우선 쓰시마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에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고려문(高麗門)에서는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쓰시마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일본이 앞선 대륙문화에 접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조선통신사의 래도(來島)를 기념하는 조선국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碑)의 웅장한 모습과 장기현립(長崎縣立) 대마역사민속자료관(對馬歷史民俗資料館)에 소중하게 전시되고 있는 『조선통신사행렬도』는 우리의 지난 역사가 결코 폄하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특히 의관을 정제한 조선인들의 모습과는 달리 맨발차림으로 가마를 들거나 마잽이(馬夫를) 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에서 당시 양국 간 문화적 수준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국관계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상념은 고종(高宗)의 딸 덕혜옹주(德惠翁主)가 국권 상실후인 1931년 일제의 정략에 의해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시게모치(宗重望)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세워진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앞에 이르러서는 완연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가 힘을 잃고 타국에 무릎을 굽히게 되면서 철모르는 소녀의 삶에도 이토록 엄청난 질곡을 남기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쓰시마 방문을 앞두고 읽은 바 있는 권비영씨의 장편소설 ‘덕혜옹주’를 통해 그녀의 참담했던 일생을 파악했던 나로서는 그 기념비 앞에 서는 순간 숙연함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일국의 황녀(皇女)로 태어나 강제된 결혼과 남편과의 불화, 자신을 이해치 못한 딸의 방황을 지켜보아야 했던 여인, 뒤이은 15년간의 정신병원 입원과 이혼을 겪어야 했던 그녀의 삶은 힘 잃은 우리 민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디 그뿐인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그녀의 지인(知人)들이 그녀의 귀국을 정부에 청원하자 “옹주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하니 당시 우리의 역사인식이 어느 정도 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1962년 37년 동안의 유랑을 끝내고 귀국한 그녀는 조국의 외면 속에서 지내다가 낙선재에서 쓸쓸히 생(生)을 마감해야 했으니 한 여인의 삶이 이토록 비극적일 수 있을까.

이처럼 우울한 상념은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는 ‘최익현(崔益鉉) 선생 순국비’에 이르러서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단식(斷食) 끝에 생을 마감한 학자의 기개를 접하면서 ‘지금 우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친형으로 영일대군(迎日大君)이라고 불리우며 만사형통(萬事兄通)으로도 통했던 이상득씨를 비롯한 현정권 실세들이 온갖 비리에 관련되어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모습을 만약 면암(勉庵)선생이 목격한다면 뭐라고 하실까? 괜한 상념들이 밀려온다.

오수열<조선대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