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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눈의 고상한 언어이기도 하고 슬픔의 말없는 말이기도 하다. 한데 ‘혈(血)의 누(淚)’. 1906년 이인직이 ‘만세보’에 연재한 국내 최초 신소설의 제목이다. 피눈물이란 뜻이다.

청일전쟁의 혼란기에 부모와 헤어진 소녀가 곤경을 극복하고 근대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작중 인물인 하인 막동이는 이런 말을 한다. “나라는 양반님네가 다 망하여 놓셨지요. 상놈들은 양반이 죽이면 죽었고, 때리면 맞았고, 재물이 있으면 양반에게 빼앗겼소.” 그 시절 피눈물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됐으나 첫 아들과 남편 사도세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혜경궁 홍씨가 한 많은 인생 역정을 회고한 ‘한중록’의 한문본 제목은 ‘피눈물의 기록’이란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다.

조선 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두 자녀를 읽고 쓴 시 ‘곡자(哭子)’에서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고 했다.

또 고산의 8세손 종부인 광주이씨 이상래가 남편을 잃고 1834(순조34년) 자신의 고달픈 시집살이를 시어머니에게 써서 보낸 편지 형식의 ‘규한록’도 피눈물로 보여진다. 고려때 학자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비통하고 분개한 심정에 우물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목을 매어 자결하는 자도 나오며, 근심과 걱정에 혼절하여 쓰러지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실명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이 이루헤어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려 처녀 징발의 폐해를 지적한 이글은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공녀(貢女)제도의 폐지를 가져왔다.

‘몹시 슬프고 분해서 나는 눈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피눈물은 이런데 쓰는 말이다.

한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9일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면서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많은 국민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당은 “박 대통령이 흘려야 할 눈물은 반성의 눈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사람들의 모든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처지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자를 둔 나라는 불행하다. 물론 탄핵안이 가결됐다고 해서 ‘피의자’ 대통령에게 씌어진 모든 혐의가 인정된 것은 아니다.

탄핵소추가 정당했는지는 헌법 재판소가 가려줄 것이며, 검찰이 적용한 혐의는 특별검사 수사 등을 거쳐 법원에서 입증되거나 소멸될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전해진 ‘최순실 게이트’의 참상은 대통령이 백번 천번 부끄러워해도 모자랄 정도로 참혹하다.

대통령 본인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지 않았다 해도 속칭 ‘B급’도 안되는 ‘비선실세’에 농락당한 꼴이다.

이런 필부(匹婦)의 허튼짓 때문에 헌재 탄핵 심판날까지 나라가 ‘시계재로’의 암흑기를 노내야 할 판이다. 부끄러워야 할 이들이 또 있다. 정치인들이다. 탄핵안 가결은 정치권이 이뤄낸 성과가 아니다.

매일 광장을 메운 민초의 촛불이 견인한 결과다. 시민들이 대통령 거취를 놓고 우왕좌왕했던 정치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광장에 모였을까. 아니다. 외려 그들이 못 미더워 나온 것이다.

촛불 주도 세력 일부는 대권 유력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함도 있지만, 많은 국민은 변했다.

내가 주권자라는 깨달음, 내가 움직여야 나라가 바뀐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국민덕에 변화의 기회를 맞은 정치권은 어떤가. 당을 공중분해해 석고대죄해도 시원찮은 여당은 서로 “네가 나가라”고 쌈박질이다.

내 기득권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조폭 정치’다. 야당은 벌써 정권을 다 잡은 듯 거침이 없다.

우리 민주주의가 국회가 아닌 광장을 더 헤매야 제자리를 잡을 것 같아 아찔해진다.

지금 서민들은 정치 때문에 눈물마저 말라있는데 이 지경이다. 얼마나 더 물매를 맞아야 희망을 줄 것인가.

/고 운 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