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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연합뉴스) 김효정 기자 = 지난 1일 폐막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세계의 눈을 한국으로 불러 모았다.

수십 년간 국제사회가 구축해온 다자주의와 자유무역 체제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질서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세계 경제의 중심축인 태평양 연안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다.

관심은 APEC 21개 회원이 전환기의 국제 무역질서를 두고 어떤 의견을 나누며, 어느 정도의 협력 지대를 만들어갈 수 있느냐였다.

고율 관세와 보호무역주의 공세로 국제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기 취임 이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APEC 정상회의이기도 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JTBC와의 인터뷰에서 "자유무역 질서가 상당한 도전을 받고 요동치고 있다"며 이번 회의가 "세계사적으로 의미있는 변동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장"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이후 20년만에 다시 의장국을 맡은 한국의 어깨는 무거웠다.

특히 '무역 전쟁'을 치르는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합의 도출이 녹록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APEC 본회의가 시작되기 전 경주를 떠났고,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서 미국의 일방주의를 겨냥한 듯 "다자 무역시스템을 함께 지키자"고 역설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인 2018년 APEC에서 WTO 개혁을 둘러싼 미중 입장차로 공동선언 도출이 불발되고, 의장국 파푸아뉴기니가 의장성명을 발표하는 데 그쳤던 전례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21개 회원은 지난한 협상을 거쳐 1일 APEC 정상들의 공동 합의문인 '경주 선언'을 타결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의장국으로서 이 과정을 이끈 한국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대목이다.

대통령실은 '경주 선언' 발표 보도자료에서 "정상회의 당일까지 문안 타결을 위해 밤샘 협상을 진행하며 미, 중, 일, 러 등 APEC 회원간 입장 차이를 중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경주선언을 비롯한 주요 성과문서 3건 모두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밝혔다.

APEC의 가치와 원칙에 대한 도전 등 불리한 협상 여건 속에서도 다자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며 "최근 무역·관세 등을 둘러싼 미중간 강경 대치 흐름을 극복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문안에 합의했다"고 자평했다.

다만 '경주 선언'은 예년 APEC 정상선언에 담겼던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간 자유무역 관련 표현을 대폭 축소하고서야 채택될 수 있었다.

직전 APEC 정상선언까지는 '세계무역기구(WTO)가 그 핵심을 이루는(WTO at its core)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체제'에 대한 지지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올해는 정상선언 본문에 WTO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빠지는 대신 각료급 공동성명에 들어가는 타협안을 택해야 했다.

WTO로 상징되는 다자간 자유무역에 대한 미국의 거부감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케이시 메이스 미국 APEC 담당 고위관리는 경주에서 연합뉴스를 비롯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올해 미국의 우선순위는 공정하고 호혜적인 무역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회원국들의 지형 속에서 만장일치를 끌어내기 위해 APEC의 기반인 자유무역 가치가 희석되는 등 변화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합의 촉진자 역할은 두드러졌지만, 더욱 깊어지는 국제사회의 분열상은 다시금 확인된 셈이다.

한편 한국 정부는 인공지능(AI) 발전과 인구구조 변화라는 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공동 도전'을 APEC 의제의 전면에 끌어내는 등 돌파구도 모색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APEC AI 이니셔티브'는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참여한 AI 관련 최초의 정상급 합의문이다.

한편 이번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 2기 이후 미중 정상의 첫 대좌가 지난달 30일 부산 김해공항에서 성사되면서 한국은 세계적 외교 이벤트의 장으로서도 주목받았다.

무역전쟁으로 치닫던 미중은 정상회담을 통해 극적으로 '휴전'에 합의했고 향후 정상 간 상호 방문에도 의견을 모았다. 향후 상당 기간 미중관계의 틀을 짓고, 나아가 국제관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합의가 한국을 무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 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도 이들의 APEC 참석을 계기로 경주에서 이뤄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