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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여. 47)씨는 침선공예가다. 쉽게 말해 바느질장이다. 바느질이야 한국여인들에겐 옛부터 기본소양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기본기에 새삼 세계인이 환호하며 아첨을 보내고 있다.

몬드리안이 시시껄렁한 한국조각보 흉내로 요란 떨더니 그 뿌리가 한국임이 밝혀지자 깜짝 놀라 과장된 몸짓으로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쑥스럽지만 봐줘야지, 별 수 있나.

아셈회의, 청와대 만찬 등에서 한국의 러너, 식탁보 등을 만나는 외국 귀빈의 표정은 하나같이 감탄에 젖어있다.

작은 나라라고 깔보던 기고만장의 허우대가 천연염색의 조각보 한 장 앞에서 단박에 기 꺽이고 만 것이다.

외국인을 접대하는 이 첨병의 역할을 하는 조각보, 러너 등을 만드는 사람이 바로 박영희씨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박영희씨와 그의 남편 김왕식(남. 천연염색 공예가. 47)씨다.

남편이 천연염색 작업을 해 고운 천을 마련하면 부인이 자르고 깁어 옷이나 커텐, 러너 등을 지어낸다.

이 부부의 부창부수에 의해 세계인의 감탄을 끌어내는, 형형색색의 천연순수물들이 태어난다.

그들 부부의 작품이 청와대에 납품되고 IOC 국제올림픽위원회 의전상품으로 선정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사실 천연염색이며 침선공예가 무슨 새로운 예술인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예전엔 우리의 생활이었다. 쪽이며 홍화며 황토며 쑥 등으로 물들인 천을 바늘로 한땀 한땀 깁어 옷을 해 입고 보자기를 만들고, 이불호청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물밀듯이 밀려든 화학제품에 현대인은 숨이 막혀버렸다. 허겁지겁 살 곳을 찾아 눈길 돌려보니 우리 옛생활 속에 숨통이 숨어 있었다.

비로소 너도 나도 살길 찾아 천연염색이며 침선 공예를 떠받들어 띄워대고 있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천연염색과 침선공예가로 나서게 된 경위도 이와 비슷하다. 삐까번쩍하게 사업을 하며 화려한 현대인의 미래를 추구하던 시절에는 시골스럽고 구태의연한 우리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짝이는 것들에 눌려있는 촌스런 것들하곤 상종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러다가 사업가의 천적인 부도라는 것을 맞았고, 사기라는 것도 당했다.

남들에게야 흔한 풍경이지만 본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숨을 쉴 곳이 필요했고, 휴식이 절실했다.

천연염색과 침선공예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전남 화순에 풀빛 공방을 마련하자마자 허황한 세월은 칼에 두부 썰리듯 반듯하게 떨어져나가주었다.

예정된 수순처럼 천연염색과 침선공예의 길로 부부는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운명이란 지상에 내려올 때 자신이 하늘과 맺은 약속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남편에겐 천연염색 작업이 익숙했고, 부인에겐 침선공예가 편안했다.

두 사람이 하나씩 추켜들고 나서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남편의 촌스러움과 아내의 섬세한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무엇보다 시골스런 기질이 맞았고, 두 사람이 비슷하게 지닌 예술적 감성이 맞아떨어졌다. 고생스러움이야 기본이지만 노력과 실력과 깊이라는 면에서 남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 재미가 붙은 부부는 달이라도 따 담듯 밤새워 일하고 공부했다.

남편은 천연염색공예가의 길을, 부인은 침선공예가의 길을 일사천리로 내달렸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시간이 흐를 수록 빛을 발했다.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향은 종이에 싸둬도 향내가 퍼져나가는 법. 순식간에 이들 부부의 작품은 전국의 눈을 매료시켰고, 소문은 청와대까지 가 닿았다. 서울 소문을 막지 못해 전남 화순에 본거지를 둔 채 인사동에 풀빛 분점을 내었다.

그 사이에 서울과 광주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전시를 가졌다. 남편은 여러군데 천연염색 강의도 나가고 부인에겐 침선공예 제자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바닷가 몽돌 구르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그들 부부는 천연염색과 침선공예의 전형처럼 돼버렸다.

그 전형의 중심에는 은근과 끈기와 촌스러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야흐로 촌스러움이 히트상품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것의 아름다움은 편안함에서 나오지요. 그 편안함은 자신을 낮추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천연염색의 색들은 자신을 낮춰서 상대와 조화를 이뤄요. 상생의 시대가 열리니 저절로 천연염색문화에 눈이 갈 밖에요. 잘난척 하려면 상대를 해치게 되고 스스로도 피곤해지잖아요. 화합과 상생의 반댓말이 잘난 척 아니겠어요? 촌스러움이 자연스러움이지요.”

그녀가 천연염색물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반짝이지 않아 수줍고 안으로 풍성한 상생의 아름다움. 그들 부부가 찾아낸 천연염색 침선공예의 요결이다.

그녀의 바늘끝에서 남편이 풀잎으로 천연염색한 옷감은 비파소리를 낸다.

그 풀빛 자락을 걷고 초록빛 내면으로 들어서면 살아있는 것들의 욕망이 가엾다. 그렇지, 욕망의 비만은 반칙이지. 세상 한 모퉁이에서는 누군가 굶어 죽어가고 있잖은가. 그렇다면 비만은 일종의 간접 살해지.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욕망은 정화된다.

화학을 벗고 자연을 입으면 정신의 샘물이 솟는다. 순수의 샘물이 화학물에 압사중인 세계인의 갈증을 사로잡을 것은 불 보듯 빤한 일.

이태리 밀라노나 파리 등지의 패션가에 한국의 풀빛 날개옷들이 하늘 하늘 자욱이 덮힐 날이 머지 않았다.

천석고황泉石膏肓과 연하고질煙霞痼疾의 한恨이 녹아내리네.

아직 세상은 무르익어 터지는 여름인가. 한국의 풀빛들이 그녀의 침선물 위에 모여 귀뚜라미처럼 가을을 사뢴다.

김현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