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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혀 있을 때에는 돈이나 지위가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돈이 있고 지위가 높다는 것은 수치다. 공자의 말인데, 동서고금 할 것이 없이 권력이나 세도를 유지하는 데는 비자금이 따르게 마련이다.

임금의 비자금을 내탕금(內帑金)이라 했는데 이권을 독점시키고 그 수익에서 얼만큼씩을 챙겼던 것이다. 이를테면 한말에 운산(雲山) 금광을 미국인 모르스에게 넘겨줄 때의 조건을 보면 이렇다. 광산의 경영과 일체의 경비는 미국측이 대돼 그 광산에서 나는 이득은 4분하여 3분을 미국측이 먹고 1분을 왕실의 내탕고(內帑庫)에 넣는 것으로 돼 있다.

세도가나 권력자의 비자금은 식객들 입에 풀칠한다는 미명으로 식객호구전(食客糊口錢)을 줄여 식객전 또는 호구전이라 했다. 그 끌어모으는 수법은 다양하기 그지 없다. 한양 오강(五江) 나루에 분산돼 있던 객주 가운데 뚝섬 나루에 모여 있던 객주는 세도가들의 앞잡이로 사동 대감댁 객주니 하는 별층이 붙어 있었다.

또 시탄(柴炭)이며 제수(祭需) 뗏목 등 물화별로 공급을 독점하여 그 이득으로 식객전을 늘렸었다. 또 이 객주는 세도가의 돈을 맡아 대금업까지 했다. 가장 금리가 싸고 신용이 확실한 돈이 이 뚝섬 객주의 식객전이었다. 지방의 벼슬 지망생들을 이 세도객주 집에 유숙시켜 벼슬 거간으로 식객전을 모으기도 했다. 가장 하위직인 9품의 참봉 벼슬이 벼 80섬이었다. 하니 알아봄직하다. 이는 현대 정치판에서도 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시절은 더욱 심했다. 호남 맹주를 하면서 특별 당비 명목으로, 또는 지방의원·광역의원·국회의원 후보 등에게 공천을 하면서 큰 돈을 거두었다. 공천이 당선이요 벼슬이니 돈 공천도 앞다투었다. 당 운영을 위해 그리한 것이라 한다.

한데 평안감사의 식객전 모으는 방법은 잔인할 정도다. 감사가 갈릴 때 인계인수 문건 가운데 하나가 평안도 지역의 돈 많은 집안의 재산별 명부다. 식객전이 필요하면 그 명부를 보고 벼슬첩지를 내린다. 허식이라 하여 명예만의 그 벼슬값으로 재산의 절반을 바쳐야 되기에 감사를 찾아가 그 벼슬을 거두어 주십사하고 청원하게 된다.

그 벼슬첩지를 반납하는데 「마다리」라는 벼슬값의 절반이나 되는 식객전을 바쳐야만 했다. 이처럼 비자금에 악덕이 따른다는데는 고금이 다를 것이 없다. 예부터 백성 한 사람 한 해 벌이의 10분의 1만을 세금으로 거두는 십일세(什一稅) 이상을 거두거나 그 이하를 거둬도 악정이라 했듯이 식객전도 십일구(什一口)라 하여 식객들 열 명을 먹일 액수 이상이나 그 이하를 끌어모으면 악덕이요 부패로 쳤다.

그런데 현대의 수백 수십억 원의 변칙 상속 또는 비자금 사건 등에 이어 삼성의 변칙 상속 주식거래, 수백 개의 차명계좌와 비자금 관리, 뇌물 살포 의혹 등으로 특검의 압수 수색까지 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박철언 전 실세장관의 ‘괴자금’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속속 드러나면서 의혹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박 전 장관은 지난 2001년 “내 소유인 오피스텔 집기와 개인 물건들을 절도하고 오피스텔 임대료를 횡령했다”며 자신의 비서관이었던 K씨(43)를 수원지검에 고소했고, 당시 수사·재판 과정에서는 ‘100억 원대 비자금’ 문제가 거론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K씨는 “박 전 장관이 기업 등으로부터 얼마나 받았는지 등을 기록해 놓은 수첩과 김 전 보좌관이 관리하던 비자금 통장이 있는데, 그것들이(오피스텔 집기를 옮기는 과정에서) 없어지자 나에게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결국 되돌려 받기 위해 고소까지 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노할 일이다. 재벌이나 관료가 이렇게 썩었는데 국민이 어찌 편하겠는가.

고운석 <시인.남발협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