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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면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 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갔다. 까까머리를 한 나는 시오리를 걸어 버스가 있는 마을까지 걸어가서 읍내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선산 가까운데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시오리 길을 걸어 선산에 가면서도 불만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옭아메기도 하고 나를 어른스럽게도 했던 집안의 종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과 압력이 나를 키웠다.

선산에서 사촌들이나 아우들은 모두 선산에 널브러진 감이나 밤을 따러 갔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웃대 어른들을 뵈었다. 어느 해에는 아버지가 낫을 들고 앞장을 서서 여우불처럼 푸르게 타오르는 수풀을 헤치고 괭이바위 부근에 있는 7대조 할아버지 묘를 가리켜 주기도 했다.

나는 군소리 없이 웃대 조상들 묘를 기억하는 일이 종손으로써의 책무라고 여기며 용감하게 턱턱 숨을 막으며 올라오는 지열과 가시덤불 등 발길을 막는 잡목들 사이로 가문의 강물을 이어갔다. 어린 마음에도 조상은 이미 과거이지만 그 과거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시원(始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나는 가까운 선배시인 한 분과 강진에 취재차 다녀왔다. 그곳은 선배의 고향이기도 했는데 선배의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잘 가꾸어진 사당(祠堂)은 지방문화재로 등재되어 있었는데, 선배는 자신의 가문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몇 해 전엔 가승보(家乘報)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당의 역사를 번역하고 다시금 고려조와 조선조의 대문장이었던 조상들을 기렸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곳 사당을 관리하는 문중 사람들은 그가 이른바 사적기(事蹟記)를 만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 이전에 만들었던 가승보를 만들 때도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이다. 돈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배는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고, 혼자서 출간사업을 진행하였다. 사적기가 출간되자 많은 사람들이 뜻있는 일 했다고 칭찬을 했다.

나도 선배에게 큰일을 해냈다고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선배도 흡족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자신들을 뿌리인 조상들의 역사와 위업을 정리하는 사업에 나몰라라 했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대다수 민중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역사는 늘 어느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진다. 수십 년 후, 또는 수백 년이 지나 그가 정리하여 편찬한 사적기를 통해 사람들은 쉽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희생과 노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길이 되고 힘이 될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예부터 우리의 역사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어느 민족보다 끈질기고 깊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대표적인 물증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보다 잘 이끌어 가겠다는 정신은 물론 그때그때의 역사를 그대로 전하겠다는 정직성이 투사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족보’이다. 오래 전부터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많이 굴절된 것이 족보이기는 하지만 어느 집안이건 족보 없는 집안은 없다. 살펴보면 집안의 천년의 역사가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대기록물로 우리 민족이 가문과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조선왕조실록’, ‘비변사일기’, ‘족보’ 등에서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애족(愛族)’하는 마음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 정부는 최근의 역사마저 폐기되어 제대로 보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역사든 잘못한 역사든 역사는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롭고 건강한 역사가 배태되고 새로 쓸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가 그대로 후세에 전해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집안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가곤 하던 열여섯 살 소년의 때 묻지 않은 순수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집안의 내력이며, 수풀 속에 유실될 수도 있는 웃대 묘를 잊지 않으려는 소년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자꾸만 헛동작을 하며 자신을 감추려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던 소년처럼 자신의 집안의 역사를 다시 정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힘이 선배의 삶을 지탱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그의 마음이 오늘의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강 경 호 <시인·문학평론가·계간《시와사람》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