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나는 오래 전부터 지루한 일상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나를 놀라게 할 쇼킹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적당히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지루한 일상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것은 나의 생래적인 기질일지도 모른다.

지방지 기자로 일하는 선후배들의 권유로 신문을 열손가락 가까이 구독하고 있는데 신문들간의 변별력이 거의 없어 재미가 없다. 특히 정치인들의 무식한 구태는 더욱 넌덜머리 난다. 왜 그렇게 속이 좁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지 의아하다.

신문 구석의 가십란에 등장하는 단골 불륜이야기는 차라리 역겹다. 아니 신문이 지겹기도 하지만 지겨운 세상인 것이다. 속이고 속고, 치고 박고, 코피 터지고 하는 것이 세상 일이기는 하지만 명분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죽인 일은 분명 살인이지만 그를 살인마라고 하지 않는다. 신라 때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해 설총을 낳은 원효와 그의 행적을 파계승이라거나 불륜이라 하지 않는다.

철새 정치인들의 탈당이나 입당의 변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다. 정치인만 되면 모두가 당리당략에 휩쓸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모두가 탁류에 휩쓸려가는 것 같다.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나 부처가 우리나라 정치판에 뛰어들면 온전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것들이 나를 지겹게 한다.

그러나 나를 가장 권태롭게 하는 일이 실상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보던 검둥이, 매번 이기는 장기’처럼 내 안에 새로운 내가 없다는 뜻이다.

‘잘 안 써지는 시(詩), 습관적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역설적으로 아직도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인간 본연의 길을 가려는 착한 심성이 내 안에서 나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 좋은 시를 생산하겠다는 욕망은 아름답다. 그 밑천이 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고갈은 시를 건조하게 하고 관념의 답습일 뿐이다. 문학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쓸 수 있는 시는 우선 참신해야 한다. 하지만 상상력의 고갈은 나를 지겹게 한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일본의 화가 한 사람이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빌딩아래에 캔바스를 펼쳐놓고 빌딩 위에서 투신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피와 살로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사실이라 해도 너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어느 화가의 창작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림이 안그려지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나는 이 답답함을 권태라고 부른다. 좋은 그림이 안 그려질 때의 초조함과 지겨움-그것은 새로운 상상력의 빈곤에서 오는 나날의 권태라 할 수 있다-은 예술가에게 형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은 늘 변화를 꿈꾸며 자신을 낯설게 한다. 이 낯선 체험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면서 즐겁게 한다.

또 하나의 권태는 ‘습관적 성찰’이다. 살아가며 수많은 기도를 하면서도 나는 늘 죄인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의 굴레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러한 습관적 성찰이 지겹다. 어떤 여성 시인처럼 차라리 미사때 회개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신성한 종교의식을 통해 그 시간만큼만 잡스런 생각을 하지 않으며 죄 짓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백주의적이고 고지식한 나의 성격으로는 그럴 수 없다.

어쨌든 변화없는 일상의 나날은 나를 권태에 빠지게 한다. 늘 새로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언제나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좌로나 우로나, 또는 높낮이가 다르기 때문에 지상의 풍경을 새롭게 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광주에서 서울을 가자면 언제나 호남고속도로를 지나고 경부고속도로를 지나야 갈 수 있다. 장성 갈재를 넘어 회덕 분기점을 지나 천안?수원을 통해 서울을 가는 것이다. 하루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간에 일어나고 그 시간에 밥을 먹고 그 시간에 일을 하고 그 시간에 잠을 잔다. 어제 보았던 사람들을 보고, 또 다시 내일이건 모레건 그 사람들과 일을 하고…….

하지만 이러한 일상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변화없는 권태가 지겹다. 그러면서도 나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반복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일생을 붙박혀 살아가는 나무들에게도 권태가 있을까? 그들은 제 키를 늘여가며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으며 무료함을 달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참으로 우습다.

그렇지만 엉뚱한 생각이 인류의 문명을 키워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상식적이고 뻔한 상상력은 이미 죽은 생각이다.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드러내는 지혜를 가진 동물은 인간 뿐이다. 그래서 인류의 먼 친척인 원숭이는 지금껏 밀림에서 산다. 그들은 동물 중에서는 가장 머리가 좋은 놈들이지만 인간의 눈에는 동물원 사육장 안에 있는 동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권태가 있기 때문에 권태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권태가 우리를 키우기도 하는 것이다.

강경호<시인, 문학평론가, 계간《시와사람》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