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1. 궁궐(宮闕)에 불이 난 후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할 정도로 경비가 사뭇 삼엄하던 궁정에 별안간(瞥眼間) 대낮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세찬 불길은 삽시간에 궁정(宮廷)을 거의 다 삼켜버렸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황급히 궁정으로 뛰어온 신하(臣下)들은 그만 아연해졌다.

밖에서는 열 수가 없는 그러니까 궁정으로 통하는 유일(唯一)한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직도 애처로운 비명(悲鳴)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송인종(宋仁宗)의 생사가 걱정된 신하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알아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삐걱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육중한 대문이 서서히 열리며 황제(皇帝)의 수레가 모습을 나타냈다. 󰡒황제 만세! 만만세!󰡓

황제의 수레는 곧 황제의 건재함을 상징(象徵)하였으므로 신하들은 얼른 무릎을 꿇고 절하며 울먹이는 소리로 일제히 외쳤다. 그런데 오직 여세만(吕世晩)은 황제의 만세를 외치기는커녕 엎드르지도 않은 채 똑바로 서서 황제의 수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허! 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놈은 왜 엎드리질 않느냐?󰡓

황제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부하가 재빨리 여세만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도도한 자세로 서 있는 거요?󰡓

여세만이 대답했다.

󰡒궁정에 변고가 생겼으니 신하는 전하의 얼굴을 보아야 시름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瞬間) 황제는 그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황제는 수레의 창문(窓門)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사하니 다들 그만 일어 나거라󰡓

󰡒예󰡓

라고 여러 신하들이 대답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때야 비로소 여세만은 시름을 놓은 듯 천천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 후 송인종은 여세만을 둘도 없는 인재(人才)라고 높이 평가하며 그를 재상(宰相)자리에 앉혔다.

2. 찰나(刹那)

삼국시대 화흠(華欽)과 왕랑(王朗)이 함께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와 쪽배를 같이 타고 강을 건너가자고 애걸(哀乞)하는 것이었다. 화흠이 거절(拒絶)하자 왕랑이 말했다.

󰡒자리에 있는데 왜 거절하는 거요?󰡓

이윽고 적군(敵軍)이 뒤따라오자 왕랑은 신변에 위협(威脅)을 느끼고 그제서야 그 손님을 보고 말했다.

󰡒손님, 어서 내리시오. 우리까지 위협을 받겠소.󰡓

화흠이 말했다.

󰡒애초에 내가 거절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오. 이미 함께 가기로 동의한 이상 급한 사정을 어찌 모른 체하겠소?󰡓

그들은 그 손님을 태우고 힘껏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3. 너희들이 죄(罪)를 범(犯)하지 않기 위해

󰡒애들아, 이제 우리 절도 부유(富裕)해지게 될 것이다.󰡓

어디서 도자기 그릇을 한 개 얻어온 하암사의 주지(住持)스님 도자기 그릇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예?󰡓

머리를 빡빡 깎은 얼굴에는 설마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도자기(陶瓷器)에는 무얼 심어도 잘 자라느니라. 이 청자 그릇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다󰡓

주지스님은 자못 진지(眞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어린 중들 앞에서 직접 꽃씨 한줌을 도자기 그릇에다 골고루 뿌려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어린 중들이 일어나 보니 과연 도자기 그릇에 활짝 넘치게 꽃이 만발했다.

󰡒와! 진짜인데!󰡓

어린 중들이 환성(歡聲)을 질렀다. 너무나도 희한(稀罕)한 일이었다. 주지스님은 이번에는 꽃을 뽑아 버리고 쌀 한줌을 뿌려놓았다. 이튿날 도자기 그릇에는 눈이 펑펑 내린 듯이 흰쌀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돈과 금을 뿌려놓으면 돈과 금이 수북이 쌓였고 무엇을 뿌려놓든지 다음날이면 가득 넘쳐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절이 금방 부유해졌다. 어느덧 주지스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老衰)해졌다. 그 무렵에 어린 중들은 단지 청자 그릇만을 믿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게을러졌다. 심지어 마당 쓰는 일까지 서로 떠밀었다. 보다 못한 주지스님이 어린 중들을 불러놓고 한바탕 훈계를 했다.

󰡒너희들은 개미를 따라 배워야 한다. 개미들은 지도자가 있으나 없으나 한 시각(時刻)도 놀지 않고 부지런히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

어린 중들은 타이를 때뿐이었다. 이틀도 못되어 그 못된 버릇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은 어린 중들을 데리고 강변(江邊)으로 산책(散策)을 나갔다. 주지스님은 돌연(突然) 품속에서 청자 그릇을 꺼내 강물로 힘껏 던졌다. 청자기 그릇은 물방울을 조금 튕겨 올릴 뿐, 이내 물밑으로 가라 않았다.

󰡒스님‥‥‥.󰡓 어린 중들은 깜짝 놀라 뒷말을 잇지 못했다.

주지스님이 태연(泰然)스레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검소(儉素)한 태도(態度)로 생활할 수 있겠느냐? 그릇을 버리는 것은 앞으로 너희들로 하여금 죄(罪)를 범(犯)하지 않기 위함이니라󰡓

/강원구<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