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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극이 전성기의 고구려만큼이나 절정기를 맞고 있다. 주말에는 <대조영>과 <연개소문>의 대격돌이 시청자들을 설레게 하고 월·화요일에는 <주몽>이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위용을 뽐내고 있다.

사극이라고 하면 으레 궁중암투나 왕실 내 권력투쟁만을 떠올리며 심드렁해하던 시청자들의 입맛을 제대로 맞춰보겠다는 방송사들의 결연한 의지까지 느껴지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홀대받았던, 역사기록에서도 희미한 고구려와 발해의 인물들이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중원을 호령하는 불세출의 호걸들로 위엄있게 환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 사극의 ‘활황장세’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당당하게 대항해야 한다는 사회심리적 요구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 중국 동북공정이 품고 있는 자아도취적 허구성을 보란 듯이 폭로해 보겠다는 의욕이 제작자와 시청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사극은 이런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필요성등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상당한 미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시성 전투 <대조영>

사극에 관한 시청자들의 상상력 지수를 높이고 있는 것이 그 미덕중 하나이다. 우선 고구려 사극은 그간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이다. 시청자들이 숱한 드라마를 통해 예습, 복습을 수 없이 마친 조선왕조오백년과는 달리, 아직까지는 생경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시기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문헌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사실 퓨전 사극을 자임한 <주몽>뿐 아니라 정통 사극임을 자신있게 내세웠던 <연개소문>이나 <대조영> 역시 사료 기근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

하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시청자의 역사적, 드라마적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예상 밖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사료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시못할 부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갑갑한 기록의 틀 안에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유폐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창작자에게는 일종의 행운이기도 하다. 물론 이 행운을 어떻게 선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와 연출자의 자유이고 책임이다.

사극에 관한 시청자들의 눈썰미가 과거와 달리 몰라보게 예리해진 지금의 드라마 환경에서 어설프게 그 행운을 남용했다가는 매서운 지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몽>처럼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급조된 멜로로 섣부르게 메우려 들거나, <연개소문>처럼 비슷비슷한 사극들에게서 요리조리 차용한 진부한 장면들로만 그 공백을 채우려 할 때에는, 어김없이 애꿎은 시청자게시판만 격렬한 원성으로 난타당하고 마는 것이다.

역사적 빈틈을 채우기 위한 과감한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시청자들에게 가장 극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사료의 정확성을 호쾌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뛰어넘는 작가적 용기가 또한 필요하다. 우리가 신라 사극도 아니고 조선 사극도 아닌 고구려 사극에 기대하는 것은 세밀한 역사적 풍경이 아니라, 그동안 잊혀졌던 우리 조상들의 드높은 기상을 실감나게 현재화하는 그 진화된 역사적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 상상력이 드라마 안에서 마음껏 분출되기를 기대하는 시청자들의 들뜬 희망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와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 자부심과 결합된 역사적 상상력이 드라마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설득력 있게 드라마라는 미적 형태로 현재화될 때뿐이다.

즉, 드라마의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적 대상을 향한 드라마적 상상력과 더불어 융성해질 때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주몽>의 스케일 논란이나 <연개소문>의 작위적 멜로에 대한 문제제기에는 모두 고구려에 대한 꿈과 상상력이 훼손되지 않고 드라마의 이름으로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고구려 사극이 아무리 야심찬 소재를 취급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하려면, 드라마의 속살 안으로 이 모든 것이 야무지게 수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소위 고구려 사극에서 중견 탤런트들이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주몽>의 금와왕(전광렬)과 대소(김승수)가 서로간의 팽팽한 대립을 그 절정의 단계로까지 끌어 올릴 때, <대조영>의 개동이(최수종)와 그의 어머니 달기(박순천)가 너무도 처절한 재회의 순간을 맞이할 때, 시청자들은 고구려 사극을 빛내는 또 하나의 미덕은 그 어떤 스케일도, 그 어떤 화려한 볼거리도 아닌 바로 배우들의 열연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이들뿐일까. <연개소문>초반부의 장쾌한 전투장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은 분명 그 장면의 압도적 규모였지만, 유명세는 부족하지만 성의있는 연기를 펼친 수많은 중견 탤런트들의 투지가 없었다면 그 장면의 감동도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극치고 배우의 연기가 중요하지 않은 경우는 물론 없겠지만, ‘배우의 재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고구려 사극에서 배우의 연기가 갖는 무게는 여러 면에서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라는 역사적 배경은 얽히고 설킨 궁중 사극이나 음모 중심의 통상적 사극에서는 미처 눈에 띄지 않던 남성 중견 탤런트들의 곰삭은 연기내공이 마침내 폭발하는 너른 마당으로 어느덧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생겨났다기보다 새롭게 재발견되었다고 해야

<대조영>의 빛나는 악역 설인귀 (이덕화)

마땅할 그들의 연기자로서의 진면목은,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그 귀를 기분좋게 흥분시킨다. <대조영>의 연개소문(김진태)과 양만춘(임동진)이 대조영(최수종)을 사이에 두고 양보없는 갈등을 전개해 나갈 때, 진중하면서도 힘있는 그들의 연기는 사극을 보는 재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시청자들로 하여금 실감케 한다.

각광을 받기보다 간과되기가 더 쉬었던 수많은 중견 탤런트들의 묵직한 연기를 맛보는 ‘행복한 재발견’의 기회를 시청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고구려 사극의 또 하나의 귀중한 미덕이다.

그러나, 고구려 사극의 미덕들을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에게도 또 다른 미덕이 요구되어야 한다. 가령, 중견 탤런트들의 ‘행복한 재발견’이 진정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역설적으로 신인 탤런트에 대한 균형잡힌 관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행복한 재발견’의 기쁨은, 재발견이 필요할 만큼 그들에게 무심했다는 역설적 사실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시청자들이 중견 탤런트들의 존재감을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만큼 ‘국어책을 읽는’ 신인 탤런트들의 미숙하지만 열정적인 연기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면, 의욕있는 신인 탤런트가 무관심 속에서 재발견이 필요한 또 한 명의 중견 탤런트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새롭고 낯선 대상에 대한 균형잡힌 애정을 시청자들이 스스로 보여줄 때, 고구려 사극의 진수를 맛보려는 시청자들의 또 다른 욕구 역시 흡족하게 충족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러한 재발견의 필요성은 비단 중견 탤런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구려 사극이 바로 오늘 여기에 되살아 나는 진정한 이유와 가치는 단지 흘러간 역사를 복고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고구려의 역사적 정체성을 현재적으로 재발견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상대적으로 낯설었던 고구려를 향한 균형잡힌 역사적 호기심이 고구려 사극의 태동을 가능하게 했듯이, 고구려를 재발견하는 고구려 사극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는 데에도 시청자들의 이 균형잡힌 애정은 더욱 긴요할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 사극이 가진 여러 미덕들을 진정으로 의미있게 만드는 결정적 미덕은, 낯선 고구려와 새로운 고구려사극을 향한 시청자들의 이러한 균형잡힌 애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