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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 찾는 길이 있다. 장성 황룡면에서 시작하여 임곡을 지나고 어등산 아래 송산유원지로 왔다가 송정리로 나가는 길이다. 철로를 따라가는 길은 좁고 또한 송정리 영광통의 번잡함이 지레 겁나는 길이다. 그래도 누군가 광주를 알고 싶다면 소개하곤 한다. 아니 같이 가자 우긴다. 우리 고장 정신문화의 소중한 유적이 이 길을 따라 있기 때문이다.

황룡면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마흔일곱 군데 중 하나인 필암서원(筆巖書院)이 있다. 호남 선비로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오른 김인후(金麟厚)를 모신 곳이다. 일찍부터 김안국(金安國) 최산두(崔山斗) 등 기묘명현에게 배웠던 김인후는 성군(聖君)이 되리라 기대한 인종이 재위 일곱 달 만에 석연치 않게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외척세도가 시작되자 홀연히 은둔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당대 행실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일목요연하게 나타낸 「천명도(天命圖)」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는 숨었지만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좌절하였지만 후진의 미래를 낙관하였다. 특히 열일곱 연하의 기대승(奇大升)을 만나고 자신의 꿈이 헛되지 않을 것을 예감하였다.

기대승은 임곡 너부실(廣谷)의 월봉서원(月峯書院)에서 만날 수 있다. 이황(李滉)과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論辨)은 우리나라 학술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학자 사이의 논쟁이 얼마나 참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일대 쾌거였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올바른 학문과 언론을 탄압하던 외척권신의 시대에 두 사람의 편지는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오고 있음을, 이를 위하여 학자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어떠한 공부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웅변하였다. 또한 이미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맑고 착한 세상을 위한 공동선언’과 같았다. 편지가 오가는 과정에서 당대 선비들은 베끼고 나눠주고, 그 사이 여러 의견과 주장을 보태며 새로운 미래에의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제 황룡강이 보인다. 그리고 어등산 아래 좁은 길로 들어서면 박산(博山)마을이 나온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에서 산화한 의병장 양산숙(梁山璹)의 마을이다. 양산숙은 양응정(梁應鼎)의 아들인데, 이이가 대과 시험을 볼 때 ‘천도(天道)’라는 논문으로 중국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었는데, 그 시험문제 즉 책문을 냈던 학자가 바로 양응정이었다. 일찍부터 경학과 시문으로 이름이 높아 백광훈, 정철 등 문호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능주에서 살았는데 이 마을 박씨에게 장가들어 옮겨 살았다. 양응정의 부친 양팽손(梁彭孫)은 조광조가 믿었던 동지 중의 한 사람으로 사화로 벼슬을 버린 기묘명현이었는데, 하필이면 능주로 유배온 조광조의 임종을 지켜보지 않을 수없는 원통을 새기며 평생을 살았다.

어느덧 송산유원지, 그리고 호남대학교를 지나 소촌공단 한 편에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떠나가는 배’를 노래한 시인 박용철의 생가와 ‘송호영당(松湖影堂)’이 있다. 송호영당은 중종이 임금이 되며 조강지처 신씨(愼氏)를 버린 것은 하늘이 맺어준 으뜸 인연인 부부의 연을 끊은 반인륜적 처사이니 ‘이제라도 다시 왕비로 모셔야 한다’는 유명한 ‘신씨복위소(愼氏復位疏)’를 올린 박상(朴祥)과 그의 조카로 외척권신 윤원형(尹元衡)을 타도하고 사림정치를 열었던 박순(朴淳)을 모신 곳이다.

신비복위소가 올라가자 연산군의 패정과 반정공신의 위세에 눌려 숨죽이던 신진사림은 드디어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선봉에 조광조가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림은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로 반격하는 훈구파의 공세에 밀려나고 말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 모친상을 당한 터라 참화는 피하였지만 결국 파직을 당하였다. 이후 복직해서는 김세필(金世弼) 김안국(金安國) 이자(李?) 등 조정에서 물러난 동지를 후원하는 한편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집필하는 등 후진교육에 힘썼다. 훗날 사림정치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이러한 박상의 영향과 부친 박우(朴祐)의 인도로 서경덕(徐敬德)에게 배운 박순은 학문과 절개의 처신, 겸양과 배려의 마음으로 사림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선조 치세 전반 십여 년 동안 의정부를 지킨 재상이 된 것이다. 이때 동서분당이 있었지만 조정자이며 중재자로 원만하게 조정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힘이 정치에 관철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래서 박순에게는 최초의 사림재상이라는 칭호가 뒤따른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 호남사림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였다. 정여립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박순이 생존했더라면 광란 같은 보복이 그 정도까지에 이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독한 아쉬움은 우리가 박상과 박순을 거의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른 길을 따라 갈 때가 되었다.

* 글쓴이 이종범은 조선대 사학과 교수로 대학박물관장을 겸하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노촌 임상덕의 학문과 시대인식」「고산 윤선도의 출처관과 정론」「1920년대 전남지방의 사회경제사정과 광주학생운동」「5?18 항쟁 증언에 나타난 ‘기층민중’의 경험과 생활」등이 있고, 최근 저서로 『사림열전 1: 소쇄원의 바람소리』(아침이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