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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의 큰 줄기인 지석강을 따라 가다 골짜기로 들어가니 당산나무도 없는 작은 마을이 있다. 화순군 도곡면 신덕(信德)리 덕리(德里)마을이다.

화순읍 주도리로 넘어가는 도깨비재로부터 마을 동쪽으로 길게 뻗은 속금재(束金峙)와 도곡면 천암리로 넘어가는 띠굴재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앞에서 멀리 남쪽을 보니 지석강이 희끗하니 등어리를 보여준다. 마을이 마치 꽃술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알고 보니 마을과 산의 형세가 연화도수형의 명당터라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최씨들의 권세가 너무 심하여 도승이 지나가면서 묘를 이장하여 분산시켜 최씨들을 폐가시켰는데 이 때문에 마을 주변 산등을 분산등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고 하듯 마을 뒤에 있는 밭을 일구면 흙기와가 많이 출토되곤 한다.

▶마을과 산의 형세가 연화도수형의 명당터

마을 뒷산이 달구산(鷄鳴山)인데산중턱에 제단 같은 게 보인다. 부지런히 올라가 보니 잡석을 이용하여 다섯 단계로 제단을 쌓아 놓았다. 바로 아래에는 절을 짓는지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쓰는 제단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달구산 끝자락을 붙잡듯 덕리마을이 앉아 있다.

절집을 짓고 있는 이곳은 지강 양한묵(1862~1919) 선생이 묻혀 있던 곳으로, 후에 화순읍 앵남리 앵무산으로 이장해 갔다고 한다. 독립지사가 모셔져 있던 곳인 셈인데 새벽을 깨우는 닭의 산이라고 생각하니 의미심장하다. 해남 출신인 양한묵 선생은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여 법도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산을 다시 내려가 마을회관으로 가니 할머니들이 모여 있다. 광주에서 5년 전에 덕리마을로 들어와 살고 있다는 조소영 할머니(88)가 호박떡을 가지고 들어온다. 할머니 존함이 현대적이다 싶었는데 뜽금없이 “내가 광주에서 미인이여!” 하신다.

“나가 어렸을 적에 말여, 얼매나 이뻤던지 울 할무니가 ‘봉오리 봉오리 꽃봉오리’라고 이름을 붙였어. 근디,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보니 백발이네.”

“아, 뻘 소리 말고 요 떡이나 잡사봐” 하면서 백발의 장순례(88) 할머니가 호박떡을 건넨다. “정들믄 고향이라고 여기가 좋아.” 꽃봉오리 할머니가 모자를 벗으면서 호박떡을 드신다.

산신단 얘기를 꺼내니 스물세 살에 덕리로 시집을 왔다는 임옥자(72) 할머니가 나선다.

“그 제단은 신천교에서 한 50년 전에 쌓았어. 거기서 화순에 있는 일곱 산신령을 불러서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여. 원래는 샛골 너머 옹달샘이 있는 곳에서 지냈는디, 멀다 봉께로 이리 옮긴 거제. 원래는 옆에 스레트집도 있었어. 몇 년 전엔가 산불이 나서 불에 타불었제.”

10여 년 전만 해도 10여 명의 신도가 있어 해마다 봄가을에 달구산 제단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집 영감이 요 동네 책임자로 제사를 모셨어. 지금은 몸이 아파서 10년 전부터 못 모시고 있소만. 근디 나 시집 오던 해에 그 산신교 책임자인 도사님이 계셨는디 대단했는 것 같습디다. 들리는 말로는 그 도사님이 축지법을 허는디 여자가 다섯이나 됐다고 그랴. 축지법을 하니까 난리가 나도 살아나겄다 싶은께 자기 딸들을 그냥 보낸 거여. 그 도사님 아들이 책임을 지고 제를 지내다가 죽고 난 뒤에는 우리 영감님이 책임을 졌지라. 근디 요새는 누가 절을 짓는다고 그요.”

“요 동네가 얼매나 좋으면 요 골아실로 도청이 들어온다고 난리가 난 적도 있었제.”

장순례 할머니가 “그만허고 떡이나 잡사봐”라고 몇 번이고 권하다가 한마디 거든다.

마을회관을 나서면서 건강하시라고 할머니들께 큰절을 올렸더니 모두 “오메” 하면서 내 손을 잡고 새해 복 많이 받으란다.

▶마을 뒤 달구산엔 동학 한 분파인 상제교 제단도

안개 오르는 논둑길을 걸어 정자로 가다 뒤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장순례 할머니가 지나간다. 마을 가운데에 샘이 있어 샘 이름을 물었다. “애기 청새알 같이 깨끗흔 시암이여. 통 이 물을 묵고 살았어. 한번도 가문 적이 없어. 요센 지하수를 파싼께 물이 좀 줄었어도 항시 그대로여.”

전 이장님 댁을 찾아 갔더니 소마굿간 방문이 열리면서 김형순(79) 전 이장님이 얼굴을 내민다. 소 여물 쑤고 나니 방 안이 따뜻해 잠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방안에 들어 앉으니 메주냄새가 진동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은 메주 띄우는 냄새다.

산제단 얘기를 꺼내니 축지법으로 날아다녔다는 도사님 얘기부터 한다. 도사님 이름은 정산근, 교 이름은 ‘상제교(上帝敎)’. 동학의 한 분파인 신흥종교였다.

빈들에 안개가 올라온다. 골안실 끝에 우산각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1970년에 상량한 정자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지만 참으로 정겨운 정각이다. 땅은 제주양씨 소유지만 마을을 위해 기꺼이 내놓아 주민들이 합심하여 지었다고 한다.

바닥을 쓸고 앉아 마을을 내려다 보니 정말 연꽃 속에 마을이 앉은 것 같다. 평화롭다. 이 평화를 위해서 주민들이 저 산 중턱에 단을 쌓고 제를 올렸을 것 아닌가.

제공 심홍섭(화순군 문화 관광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