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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대보름이다. 이 때면 이 땅의 주인들은 가장 경건해진다. 일 년의 진정한 시작, 업보 같은 농사일을 시작해야 하는 출발지점.

날은 풀리고 대지는 따뜻한 기운을 내뿜을 준비를 하는 시간. 마을마다 당산제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그 절정에 이르는 시간이다.

화순은 산이 많은 고장이다. 74%가 산이니 가히 첩첩산중이다. 특히 남면, 동복면, 북면, 이서면에 집중적으로 산이 많고 그래서 산간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화순 민속문화의 보고라 할 정도로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는 이 때가 되면 당산제 등 민속놀이를 행한다.

▶부부가 마을을 대표하여 지내는 당산제

그 날 나는 화순 남면 절산리라는 깊은 산골마을을 더듬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속이라 조용하기만 했다. 다금(茶金)마을도 숨을 죽이고 있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순간. 하늘을 보니 희뿌염하다.

이때 마을 앞 당산거리에서 모닥불이 출렁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모양이다. 희뿌염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당산나무와 마을 동각 그리고 모닥불이 내 두 눈에 깊이 박혔다.

조심스럽게 당산으로 다가갔다. 왼쪽으로 꼰 금줄을 차마 넘지 못하고 당산제를 지켜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모시는 조촐한 당산제. 곱게 한복을 입은 두 분은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추위를 달래고 있다.

모닥불을 쬐던 할아버지가 징을 쳐서 제의 시작을 알린다. 바람이 세차다. 모닥불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불티가 날린다. 술을 올린 할아버지는 축을 읽는다. 할머니가 비춰주는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 순간 렘브란트의 그림 속 불빛이 떠올랐다.

제사 음식을 조금씩 골고루 걷어 창호지에 싸서 무덤 위에 가지고 간다. 그리고 도끼날 반대편으로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 속에 창호지에 싼 잿물을 넣고 황토로 덮는다. 그 위에 다시 돌을 올려서 눌러놓는다.

할아버지가 한지에 불을 붙여 소지를 한다. 할아버지 손바닥 위에서 날아 오르는 불꽃은 바람 따라 솟구치다 사라진다. 할아버지의 소원, 마을 사람들의 소원, 모두의 소원을 담아 하늘에 흠향된다. 할머니도 몇 개의 소지를 하늘에 날린다. 올해도 마을 사람들 모두 건강하게 해주고 풍년들게 하소서, 집 나가 객지에 있는 자식 잘 되게 해 주소서… 아마 그런 소원일 것이다.

제가 끝나자 할아버지가 앞장서서 징을 치며 당산숲을 한바퀴 돈다. 당산제를 무사히 다 지냈다는 신호다. 무덤 뒤에 있는 작은 깃발은 ‘천룡거방(天龍居傍)’, ‘당산재린(堂山在　)’, ‘성황신위(城隍神位)’란 문구를 각각 창호지에 써서 대나무 끝에 묶은 것이다. 세찬 바람에 깃발이 휘어진다.

당산제가 끝나고 나자 할아버지는 나보고 와서 음복을 하란다. 조심스럽게 금줄을 넘어 들어가 예쁘게 깎은 생밤을 집어 깨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없단다. 8년 전부터 해마다 두 분이 대표로 제를 모셔왔다고 한다.

오이탁(62) 김덕순(58) 부부. 두 분은 원래 더 산속으로 들어가는 야동마을에서 살다가 8년 전에 다금으로 이사와 살면서 마을 동답을 경작하게 되었고 그 해부터 마을 당산제를 지내게 된 것이다. 50여 년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메구를 쳤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소멸되다시피 한 당산제. 하지만 두 분의 정성은 그 시절과 다름이 없다.

느티나무 다섯 그루로 이루어진 당산숲에 켜 논 촛불이 꺼질 듯 위태롭다.

나는 다른 마을 당산제 조사를 위해 발길을 돌렸다. 고갤 돌리니 밤하늘을 배경으로 당산나무와 모닥불이 명징하게 잡힌다.

▶당산제 음식은 천룡 밑 당샘물로

그리고 그 주 일요일 낮에 다시 마을을 찾았다. 마을 앞에 있는 똥메 옆 당산숲에는 그날 의 당산제 흔적이 역력하다. 금줄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타다 만 촛불자국이 그대로다. 마을 앞 배나들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전히 매섭다.

당산제를 지낸 오이탁 할아버지 집을 찾으니 아무도 없다. 조경사업현장에 일하러 나가셨다 한다.

그 집 바로 뒤 야산(마을 사람들은 ‘산당’이라고 불렀다)에 있는 ‘천룡’으로 갔다. ‘천룡할아버지’라고 해서 당산제 지낼 때 이곳에서 먼저 제를 모신 다음, ‘당산할머니’라 부르는 마을 앞 당산숲에 가서 제를 모신다.

천룡엔 흙무더기로 된 작은 무덤이 있는데 천룡할아버지 무덤이라고 한다. 자식 없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마을 안골짜기 세 마지기 논을 마을답으로 내놓고는 제삿날이면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올려달라 유언을 했다 한다. 그래서 마을답을 지어먹는 사람이 제를 지내면서 당산제를 같이 지내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임진란 전에 마을사람에게 한 노파가 나타나 현몽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산신목이다. 곧 큰 난리가 일어나겠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이 마을에는 아무 해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임진란 때 아무런 해가 없었다. 이후 이를 신기하게 여겨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천룡 밑에 있는 당샘으로 간다. 한번도 마르지 않았다는 작은 샘인데 이 물로 당산제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언 손을 넣어 한 모금 마시는데 그 물맛 한번 좋다.

다금마을 안에는 샘이 두 군데나 있다. 덕대골에서 내리는 물로 ‘윗뜸시암’, ‘아랫뜸시암’이라고 부르며 여전히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마을 뒷동산은 최고의 명당터

덕대골 안꼬랑이(고랑)엔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금굴이 있었고 금이 많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돈이 많아 부자 동네라고 한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금굴이 있는 안쪽 마을을 불무동 또는 ‘대장장이 야(冶)’자를 써서 야동(冶洞)이라고 부른다.

대장간에서 철광석을 정제할 때 불무질이라는 것을 하는데 그래서일까, 마을은 두 차례 큰 화를 당했다고 한다. 양지뜸에서 난 불로 마을 전체가 전소된 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마을 주민 20여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이 때문에 같은 날 제사를 모시는 집안이 많은데 그런 공동의 아픔 때문인지 주민들의 단결력이 대단하다.

그 날도 광주에 나가 사는 분이 대보름이라고 동네 분들을 위해 떡 두 상자를 가져와 마을 회관에 풀었다.

다금마을은 다공(茶貢)이라고도 부른다. 차를 재배하여 공납했던 곳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인동에는 차(茶)가 전혀 없단다.

마을은 깊은 산속이지만 살기 좋은 곳이라 외지 사람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마을 뒷동산은 이 일대에서 최고의 명당터라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워낙 명당터라 그곳에 묘를 쓰려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부자 집안이었던 영일 정씨 집안에서 초란이굿 12마당을 펼쳐서 동네사람들이 놀자판에 정신없을 때 몰래 마을 뒷동산에 묘를 조성해 버렸다고 한다. 그곳에 가보니 정말 영일 정씨 묘가 넓게 있다. 마을에는 영일 정씨가 없지만 다금마을 인근의 모든 임야는 영일 정씨 소유라 할 정도로 재력이 있는 집안이라 한다.

그런데 그 넓은 터에 비석 하나 없다.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무거운 비석을 만들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서 비를 전혀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저 그곳에 있는 멋진 소나무가 좋아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선다. 마을 앞으로 나가니 대동댁, 정동댁, 서남댁, 매월댁이 마을앞 꽃길을 따라 산책을 나선다.

글/사진=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