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뉴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불빛을 찾아 길을 나선다. 정월 대보름이면 대지가 꿈틀거린다.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가장 경건해지는 순간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당산제 등 마을조사를 멈추지 않았던 터인데 올해는 낮부터 비다. 정월에 내리는 비치곤 제법 많은 비가 온다.

▶대보름마다 금줄 두르는 당산나무

무등산 자락 안양산을 넘어가는데 안개가 몰려온다. 엉금엄금 차를 몰아 안개를 빠져 나오니 어느덧 이서면 야사(野沙)리다. 용호(龍虎)마을 앞 울창한 당산숲이 훤하다. 마을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금줄을 쳐놓았다.

당산숲으로 가니 당산제 준비를 하느라 주민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다행히 비는 안개비로 변하여 제 지내기는 수월하겠다. 회관으로 가니 제관인 이장님이 양복 차림으로 기도하듯 앉아있다. 사람들이 회관으로 모여든다. 아낙들은 준비한 제물을 챙긴다.

저녁 아홉시가 되자 박종달(75) 할아버지가 할머니 당산 앞에 촛불을 밝힌다. 주민들이 제상을 놓고 음식을 진설한다. 주민 일곱 분이 손을 모으고 선다. 할머니들 세 분은 뒤쪽 모닥불가에 서서 당산제를 바라본다. 헌관인 이장님이 술을 올리고 노인회장님이 축문을 읽는다. 주민들은 무릎 꿇고 앉는다. 매굿도 없는 참으로 소박한 당산제지만 주민들 마음은 하나다.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술 한잔 올린다.

간단한 제가 끝나고 당산 할머니와 앞에 있는 선돌에 헌식을 한다. 그리고 참여한 마을 사람들이 소지를 올린다.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주민들과 회관에서 음복하고 먼저 일어서서 당산을 나오는데 당산나무에 걸어놓은 등불이 따스하다. 대보름날에 비가 내린 걸 보니 올해 농사걱정은 덜겠다.

▶절터골엔 단애절벽이 층층으로 장관

그리고 보름이 지나 용호마을을 다시 찾았다. 마을 사람들은‘용호’보다‘도롱굴’이라고 부른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도룡리(屠龍里)’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큰바위가 여기저기 많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단다. 또한 용호라고 쓰는 것은 마을 형국이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용의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정말 마을의 동쪽과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길게 마을을 감싸고 도는 형국이다. 마을 앞으로는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영신천이 퇴적시킨 작은 들판인‘조탑들’이 펼쳐져 있다.

1500년 경에 담양에 거주하던 밀양 박씨의 자손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주위의 산세가 아름답고 용이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마을의 형국을 보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여러 성받이에 20여 가구 40여 명이 살고 있다.

영신천 다리를 건너면 원형의 탑을 쌓고 선돌을 올린 조탑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조탑께’라고 하는데 조탑과 당산나무에는 대보름때 두른 금줄이 아직도 있다. 언제 세웠는지 모르는 이 조탑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마을에 자주 불이 났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노승이 이곳에 탑을 세우고 나무를 심으면 불이 나지 않을 것이라 하여 그리했는데 그 후로는 마을에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영신천변에는 수구막이로 100m가 넘은 숲쟁이가 있었는데 6·25전쟁 이후 모두 베어 팔아버렸다고 한다. 숲쟁이가 우거질 때면 마을이 가려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나무가 모두 없어진 뒤로는 마을에 재미진 일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마을 입구 절터골에 단애절벽이 층층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경치가 좋아 마을 당산이 푸른 잎을 낼 때면 화가들이나 사진작가들이 자주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백 살 자신 이사순 할머니

이장님이 경운기를 끌고 들로 나간다. 노인회장님은 영신천변 작은 밭뙈기를 일구고 있다. 영신천변을 따라오는 봄바람은 제법 차가워도 오는 봄은 어찌하지 못하나 보다. 매화향이 그윽하다.

회관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 웃음소리 들린다. 이서초등학교 1학년인 동현이가 광주에서 온 친구들과 놀고 있다. 지금은 동복호에 잠긴 보산리 월평마을에서 온 이애순(80) 할머니는 광주에서 온 딸네 식구들에게 뭐라도 싸줄려고 마당을 분주하게 오간다. 광주 아들집에 나가고 빈 집인 이현금 할머니 집 뒤안 밭에는 지금 매화가 한창이다. 먼지 쌓인 마루와 우체통에 가득한 우편물들이 할머니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회관으로 가니 아주머니들 몇이 십원 짜리 민화투를 치고 박종달 할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다.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 한 분이 정정하게 앉아 계시는데 알고 보니 백 살 자신 이사순 할머니다. 박종달 할아버지의 어머니시다. 원래는 동복호에 수몰된 보산리 난산마을에서 살다가 마을이 수몰되자 도롱굴로 들어왔다고 한다.

“세상 살기 좋은 디가 거긴디 물이 들어가 불었어.”

원래 동복 내리 수남촌에서 난산으로 시집을 왔다는 할머니. 몇 살 때 시집 오셨나고 물으니 “가슴에 얹고 살다가 잊어 부렀어”하신다. 다시 여쭈니“열일곱에 시집을 왔어. 영감은 일곱을 더 자셨고”하신다.

백 살 할머니는 여전히 난산이 좋다신다. 물에 잠겨 보지도 못하는 그곳 난산마을을 말이다. “들이 좋아서 밥 바구니 이고 나가는 일이 없어. 거기서 일허고 거기서 밥 묵고 헌께.”

작년에 동복향교에서 장수상도 받은 백 살 할머니는‘시월 열사흘’당신의 생일도 또렷이 기억한다. 설 때 만들었다는 쑥떡을 쪄온 할머니가 알고 보니 백 살 할머니 며느리다. 며느리가 준 쑥떡을 세 점이나 자신 할머니,“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묵고 노요. 허허. 아야 냉수 한 그릇 가져온나.”발음도 똑 부러진다.

가만히 앉다가도 금방 옆으로 자빠지는 다른 할머니를 보며 백 살 할머니가 “바람등에 어뜨케 나왔소.”오히려 걱정하신다.

월평댁 이애심 할머니 며느리가 광주 집에 간다고 인사하는 틈에 나도 일어서서 나서는데 민화투 치던 할머니가“할머니들이랑 노니라고 고생했소”한다. 아니, 즐거웠다.

당산거리를 지나 마을을 나가는데 절터굴 옆 밭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괭이질을 하고 있다. 그 괭이질 참으로 기운차다. 당산 너머 무등산이 훨씬 가까이 왔다.

글·사진=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