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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많은 동복면에서도 가장 큰 마을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3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105호로 줄었다. 조선시대에는 검부역(黔富驛)이 있었던 마을이라 검부역, 검부역촌이라고 부르지만 한천마을로 통한다.

찬시암, 웃들시암, 버버리시암, 동청시암…6군데나 되는 샘

화순 동복면 한천(寒泉)리 한천마을.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사람들이 많았을 터. 고려시대에는 寒泉里驛(한천리역)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역사는 꽤 오래된 셈이다.

마을 이름이 된 한천, 즉 찬샘은 마을 아래뜸 뒷뫼(어떤 사람은 이어봉(鯉魚峯)이라고도 한다) 끝자락에 있다.

물론 오래 전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 물을 먹고살았다. 하지만 상수도가 놓이면서 지금은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아예 덮어 버리려고 했는데 마을에 화재가 났을 때를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싶다.

나를 안내해 준 박남구(68) 할아버지는 이 샘을 살려야 한다는 말에 선뜻 동의한다. 당연하다. 마을 이름의 근원이 된 샘인데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원래는 바가지로 직접 떠서 사용했는데 주암호가 생기고 뒷뫼로 터널을 내서 광주로 가는 수로공사를 할 때 물이 줄었다고 한다. 샘 안을 들여다보니 그대로 맑은 물은 여전하다. 한여름에도 발을 담그고 1분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찬시암, 한천이다.

이외에도 마을에는 특이하게 샘이 많다. 6군데나 되는데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마을 우뜸에 있는 웃들시암(와룡천), 마을 가운데 있는 버버리시암, 마을회관 앞에 있는 동청시암 등이 있는데 그래서 정월 대보름이면 가장 먼저 샘굿부터 했다 한다.

“일흐다가도 치고, 놀다가고 치고”…마을 자랑 한천농악

한천농악은 마을의 자랑이다. 1978년에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일흐다가도 치고, 놀다가고 치고…. 시간만 나믄 깽본(강변)에 나가 쳤제. 굿만 했다 흐믄 어찌 그리도 재미진가 몰라. 마을 사람들이 다 나가서 쳤제이.”

회관에서 만난 전광순(78) 할머니. 도중에 들어와 조용히 벽에 기대고 앉아 있다가 한천농악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에 흥이 붙었다. 소고를 쳤다는 할머니는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이 얼른 생각이 안 나는지 한참 뜸을 들인다. 옆에 있는 장복향(82) 할머니가 “전광순!” 한다. 몇 살이냐고, 띠가 뭣이냐고 물어도 잊었다고 하신다. “자네는 원숭이 띠여! 팔십둘!” 장복향 할머니가 똑부러지게 가르쳐준다.

“근디 요즘은 한천농악이 한물 갔어. 마을에서 굿 흔 지가 10년도 넘었을 것이요. 사람이 없어. 다 죽어뿔고 꼬부랑 할망구들이 다 되아갖고 어뜨케 칠 것이요. 그래도 지금은 젊은사람들이 있고 단원들이 있는디 군에서 뭔 행사 같은 거 흐믄 학생들 델꼬(데리고) 와서 해. 그렇게 안 흐믄 헐 수가 없는디 어쩔 것이여. 증말 옛날에는 재미졌네. 안 그런가. 정월이믄 및날및칠(몇날며칠)을 굿치고 놀았응께. 지금은 간혹 대학생들이 전수관에 와서 배우기도 흐고 전수자가 가서 갈채(가르쳐)주고 그런갑습디다만, 옛날 같지는 않제이.”

정월이면 읍내 다지리마을 가서 액맥이굿…‘인정받는’ 실력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복현감이었던 황진 장군이 한천농악을 앞세우고 진주성으로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일제 때 공연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 걸 보면 한천농악은 예부터 꽤 유명했던 것은 사실인가 보다. 강병서, 전치열, 장동지, 정공안, 이선일, 김복동, 박천한, 노판순, 전전박, 노승대, 박춘백으로 이어지는 상쇠를 중심으로 호남좌도농악의 맥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한천농악 단원은 아니지만 여전히 풍물을 좋아하고 장구를 친다는 이장은 한천농악의 활성화와 관련해 누구 못지않게 고민이 많다. 마을의 자랑인데 예전 같지 않아 속상한다고 한다. 그래도 한천농악이 다른 동네에서 인정을 많이 받고 있어 뿌듯하다고 한다.

정월이면 화순읍내에 있는 다지리라는 마을에 몇 년 전부터 해마다 액맥이(액막이)굿을 가는데 그 덕에 다지리 마을에 화가 없어지고 좋은 일만 있다고 주민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다지리 마을 뒷산을 깎아 수자원공사에서 건물을 만든 뒤로부터 마을에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한천농악을 초청하여 액맥이굿을 했던 것이다.

동복천 깽번에서 돌 날라다 쌓은 담장도 구경거리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물을 쳤다는 쌍정자로 나갔다. 마을 서쪽 동복천변에 있는 쌍정자는 원래 당산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사이로 길이 있어 마을 입구 역할을 했는데 어느 핸가 목을 맨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쌍정자라고 부른다. 400여 년이 다 된 당산나무가 튼실하게 하늘을 받치고 있다. 한줌 햇살 아래 주위 채마밭에는 김장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로 분주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우선 눈에 띄는 게 돌담이다. 시멘트 담이 없지 않지만 돌담이 잘 남아있어 어슬렁거리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로 옆 동복천 깽번(강변)에서 가져온 돌로 쌓은 담이다.

담장이 워낙 길어서 도중에 무너지지 않게 나무를 넣는다든가 기둥을 세운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지혜까지 엿보인다. 또한 담장 중간에 빗물받이를 박아서 담장을 보호하려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 그 조형미가 일품이다.

그런데 골목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이번 정부에서 지원하는 ‘행복마을’ 사업에 담장을 모두 헐고 시멘트 담을 만들어 흰색으로 칠하면 어떨까 한다고 한다. 나는 질겁을 하고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마을의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누차 얘기했더니 동의하는 표정이다.

“저런 바우가 우리집엔 서이나 되아”

그렇게 골목길을 기웃거리는데 담장 하나가 눈에 띈다. 바위를 그대로 두고 시멘트 담장을 썼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채만한 바위가 마당가에 들어앉아 있다. 바위 일부가 골목으로 나간 것이다.

할아버지가 방문을 연다. 낯이 익다했는데 알고 보니 지난 번 화순군 축제 때 한천농악 공연에서 징을 들었던 할아버지다.

강임기(83) 할아버지는 선한 표정으로 방문에 기대어 “저런 바우가 우리집엔 서이(세 개)나 되아” 한다. 수돗가에도 바위가 있는데 바로 옆의 절구통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뭐할라 깰 것이요. 원래 있는 것인디.”

바위 주위로 꽃나무를 심어 놓은 할아버지한데 바위 때문에 귀찮지 않냐고 여쭈니 하시는 말씀이다.

할아버지 뒷집인 이남주 할머니 집에는 더 큰 바위가 있었다. ‘검바바우’라 하는데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에 한 장사가 힘 자랑하려고 큰 바위를 굴렀는데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가 그만 바위에 깔려 죽어버렸다. 그 후 바위는 검게 변해 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농부의 넋을 위로하며 함부로 힘 자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고인돌 같은데 마을 사람들은 고인돌 관련해서는 금시초문이고 모두 ‘검바바우’라 한다.

주민들의 휴식처인 홍정자 숲정이

마을 남쪽 어귀, 숲정이가 있는 홍정자로 갔다. 길목에는 농어촌공사에서 시행하는 행복마을 조성 권역에 포함되어 있는 사업들을 쓴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괜시리 외양만 뜯어고치는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될 텐데 걱정이다. 돌담장을 헐어내겠다던 주민의 말이 생각나서 안타깝다.

홍정자라는 숲정이는 홍씨 집안과 관련 있다고 해서 주민들은 무조건 홍정자라고 부르는데 그 연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할아버지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이 숲정이는 여름이면 좋은 휴식처다. 콘크리트 평상에 흰눈이 쌓이는 겨울 넘어 봄 지나, 내년 여름이면 또 다시 주민들로 가득하겠지.

좋은 숲정이가 있는 그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데 겨울 한줌 햇살은 이미 서산에 지고 저녁밥 짓는 연기인지 하얀 연기 피어오른다.

글=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