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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정월 대보름이 며칠 지난 어느 날, 진도 군내(郡內)면 덕병(德柄)리 덕병(德柄)마을. 마을을 지켜주던 석장승 2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중장비를 동원하여 장승을 뽑아가 버린 것이다.

세상에 그런 나쁜 놈들이 있을까. 마을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장승을 찾기 위해 지역 방송국과 신문사에 보도자료를 내고 서울 인사동은 물론이고 전국을 헤매다니며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1992년 전라남도 주관 남도문화제에 진도 대표로 나가 당산제 공연을 했을 당시에 제작했던 나무 장승을 세워놓고 장승제를 지냈지만 본래의 장승을 도난당하고 난 후부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젊은 사람들이 급사를 했고 정신이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1993년 마을자금 400만원을 들여 석장승을 원래 장소인 진살등(鎭殺嶝, 바다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살기를 진압하는 곳이라 하여 ‘진살등’이라고 불러왔다)에 다시 세우고 장승제를 모셨다. 그 덕분인지 그 후로는 마을에 불미스런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사라진 석장승 대신해 진살등에 장승 다시 세우고 덕병마을은 600여 년 전인 1400년 경 마씨가 세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20여 년 전 마을 앞에 나리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해변마을이었다.

1789년에 제작된 《호구총수》에도 마을명이 나올 정도이니 역사가 만만치 않은 마을이다.

덕병마을을 ‘덕저리’ ‘떡저리’라고도 불렀다는데 옛날 이 마을에 거주하던 도사가 명절 때 부녀자들의 ‘떡동구리’를 모아들였다는 데서 유래된 속명이라고 한다.

《세종실록》에 보면 도 순찰사였던 김종서가 ‘말 목장을 짓기 좋은 곳으로, 해원 동쪽에서 덕병평 사이에 200필의 말을 기를 수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어 옛날에는 목장지였던 것 같다. 실제로 1445년(세종 27년)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목장이 만들어졌다. 이 목장을 위해 신안주씨들이 입거하고 마을 앞 간척을 하면서 밀양박씨가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을 북쪽 나리방조제 건너에 있는 벽파진 수군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둔전을 두었고(덕병마을 옆이 둔전리이다) 이를 관리하는 병사들이 있던 곳이 덕병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덕병마을 앞 ‘배나뭇들’을 진도 제일의 옥토라고 자랑한다. 마을 뒤 달마산 일명 ‘덜뫼’에서 뿌리내려 배나뭇들의 옥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배나뭇골을 주민들은 ‘당뫼’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사구(砂丘)로 나무들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많았기에 배나뭇들이다. 그 흔적으로 지금도 송림이 사구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하늬바람을 막으려고 심었다고 한다.

그 송림을 잘 가꾸기 위해 무던히 애도 썼던 모양이다. 연료가 없던 시절에 나무 밑 솔가리를 사람들이 자주 긁어가서 생육에 지장이 생기자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렇게 지킨 소나무가 지금은 방풍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덕병마을은 동으로는 금골산, 서로는 고두산(마을 사람들은 수리봉이라고 한다), 남으로는 달마산(덜뫼)이 둘러져 있어 나지막한 평지에 있는 해안마을이지만 해안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마을의 집들이 대부분 서향이라는 것이다. 마을 동쪽에 있는 금골산의 호랑이가 입을 쩌억 벌리고 마을을 보는 형국이어서 호랑이와 마주보지 않기 위해서라니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호랑이 형국의 바위 앞에 시누대(신우대)를 심어서 호랑이를 가려버렸다고 하니 자연에 그토록 감응하고 순응하며 살았던 삶의 지혜가 놀랍다.

소 턱뼈를 장승 목에 왼새끼로 묶어 걸어두고 마을 사람들은 덕병마을을 진도 최고의 명당으로 여긴다. ‘덜뫼에서 뿌리내려 옥토 만들고 범아우지(금골산 호랑이 벌린 입)는 마을재앙 막아주고 진살등은 질병 막아주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옛것을 보존하려는 노력 또한 어느 마을보다 높다. 전통방식대로 정월이면 ‘걸궁’을 치면서 마을 동제(洞祭, 마을에서는 ‘망제(望祭)’라고 부른다)를 지내고 음력 6월이면 충제(蟲祭)도 지낸다. 망제는 당할머니가 모셔져 있는 마을 끝 당집에서 시작한다.

당할머니께 ‘당을 올리고’ 마을 가운데 있는 샘에서 샘굿을 치고 마을 앞에 있는 다리께에서 거리제를 지낸다. 거리제는 거리를 떠도는 객귀를 위한 제사이다. 특히 덕병마을 거리제는 삼별초와 관련이 있다.

삼별초가 대몽항쟁 당시 죄인들을 참살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마을에 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매년 거리제를 모시는 것이다. 거리에다 차일을 쳐서 임시제장(祭場)을 만들어 이곳에서 망제에 필요한 모든 음식을 장만한다고 한다.

소머리를 고아 살을 발라내고 턱뼈를 장승의 목에 왼새끼로 묶어 걸어둔다. 작년에 걸었던 턱뼈는 깨끗한 곳에 버리거나 땅에 묻어버린다. 턱뼈를 거는 까닭은 잡귀가 그것을 무서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는 소를 잡는 경비가 많이 들어 돼지를 잡고 돼지 턱뼈를 장승에 걸었는데 이장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는 이장을 잡아가겠다고 하자 깜짝 놀란 이장이 개인적으로 소머리를 사서 제물로 장만하여 제사를 모신 적도 있었다 한다.

그 후로는 돼지고기를 사용하자는 말이 두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승제를 지낸다. 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진살등에 있는 장승 앞에서는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부터 거리제를 통해 몰고 나온 모든 잡귀잡신을 날당산굿을 치면서 몰아버린다. 그래서 특별히 제상을 차리지 않고 간단하게 제물들을 장승 주위로 뿌리고 피워놓은 짚불을 넘어서 ‘에비야’ 하는 소리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돌아와 버린다고 한다.

이 같은 마을 망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경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구전(人口錢)을 걷는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하다못해 정월 열닷새에 태어난 아이도 인구전 대상이다. 예전에는 1인당 100원씩이었는데 지금은 1000원씩 인구전을 걷는다.

음력 6월이면 해충을 막기 위한 충제(蟲祭)까지 치러

하절기에 모셔지는 충제(蟲祭)는 해충을 방제하기 위해 지낸다. 충제 역시 망제 못지않게 엄숙한데 마을 뒤 달마산(덜뫼) 충제터에서 지낸다. 충제에 대해서도 마을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예전부터 반촌만이 충제를 모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충제를 모시는 것이 미개한 것처럼 생각되어 지내지 않는 마을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마을에서는 지내던 충제를 그친 그 해에 한 부부가 독사에 물려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는 덕병마을에서 충제를 더욱 굳건히 보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즘 덕병마을 주민들은 마을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도 열심이다. 마을 안에 있는 성광교회를 중심으로 골목길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벽마다 활짝 핀 꽃그림으로 환하다. 콩깍지단을 머리에 이고 그 꽃길 지나 귀가하는 복순엄마(75)는 친절하게 당집까지 안내해 주었고 당집을 관리하는 하얀 머리의 백옥만씨는 “올 대보름 때 와봐. 오믄 우리 동네가 어뜬 동네란 걸 알 거여”라며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또한 마을 내력을 줄줄이 설명해 주던 이상문(72)씨의 설명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德柄’을 파자(破字)하면 ‘彳十四一心木一內’인데 그대로 뜻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정월 십사일 한마음으로 나무 안에 있다’, 즉 정월 대보름날 마을 ‘망제(望祭)’를 지내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마을명에서부터 전통을 중요시하는 주민들이 있는 한 덕병마을엔 안녕과 번영이 계속될 터이다.

글·=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