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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곳은 우리네 삶과 함께 한 산 증인이다.

우리네 삶을 그대로 보듬어 안고 살아왔던 이 땅의 역사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인데 우리는 이 땅을 너무 모른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할 땅인데도 말이다.

땅에는 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들인 평야도 있으며, 냇가도 있고, 갯가인 포구도 있다. 이러한 땅에 사람들은 생활의 편리를 위해 이름을 지어 붙여 쓰고 있다. 그래서 땅의 이름을 보면 조상의 생각이나 역사, 그리고 전통과 풍습, 의식구조까지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지명의 대부분은 그 곳의 땅 모양, 위치, 색상, 하천과의 관계, 풍토, 기후, 산물, 교통관계, 전설, 사건 등에서 유래된 것을 많이 붙였다. 행정자치부 자료에 따르면 지명에 많이 쓰이는 한자는 2만389자 중에서 山, 谷, 新, 大, 松, 川, 峴, 上, 內, 南, 岩, 東, 水, 下, 浦, 村, 井, 長, 龍, 月 등의 순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통해서도 땅의 이름은 생활주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너릿재라는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시원스럽게 뻥뻥 뚫린 터널이 있어 고개를 넘는데 1분 여도 안되지만 70년 전에는 너릿재를 넘기 위해 다리품을 팔아야 했다.

너릿재는 슬픈 역사를 많이 가진 고개이기도 하다. 19세기 봉건 왕조의 압제를 끊고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군이 이 고개를 넘다 관군과 부딪쳐 작두질에 목이 잘렸고, 1946년 8월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에 참석키 위해 광주로 가던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이 고개에서 미군정과 충돌하여 사상자가 났다.

1980년 5월에는 이 고개 아래에 있는 주남저수지에서 목욕하던 아이들이 계엄군의 총탄에 숨지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사상자가 난 이 고개를 사람들은 널棺재라 불렀다.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죽어서 널에 실려 너릿너릿 내려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지금의 너릿재이다. 그 의미를 알면 약간은 기분 나쁜 고개이긴 하지만 이렇듯 우리의 땅은 우리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찬바람 부는 지금 터널이 아닌 옛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이 고개는 아름다운 고개이다. 꽃이 피고 새가 울면 이 고개에도 봄은 찾아올 터이고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이 고갯길을 찾아 소풍갈 것이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너릿재를 넘으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이십곡리二十谷里이다. 언뜻 보기에는 골짜기가 20개쯤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자연부락명은 ‘숨은실’ 마을이라 한다. 골짜기가 구부러져 있어서 마을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숨은실〉수무실〉수물(=20=이십)실(=곡)〉수물실〉이십곡으로 와전 표기된 것이다. 그래도 이 마을은 여전히 깊게 숨어 있어 전쟁 중에서도 이 마을만은 화를 면했다고 하니 원래 이름 덕을 톡톡히 본 마을이라 하겠다.

구례에서 순천을 향해 17번 국도를 타고 송치松峙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전라선의 학구역鶴口驛이 있는데 이 곳이 필자의 고향이다. 이 곳에 평생을 땅과 함께 하신 부모님이 계신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이 곳의 지리 등 모든 것을 배웠다.

사람에게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곳이 이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지천으로 나 있는 그 많은 들풀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날아다니는 들짐승, 그리고 말없이 누워있는 땅의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가르쳐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땔감 구하러 많이 가는 ‘나무골’, ‘국사봉’이라는 인근의 높은 산 아래에 있는 ‘국사봉들’, 공동묘지가 있는 ‘공동밭지들’, 밭처럼 평평한 바위가 있는 ‘평전바위들’, 산꼭대기에 항상 구름이 몰려 있었는데 호랑이가 뛰어오르자 구름이 걷히고 풍년이 들었다는 ‘개운開雲골’, 크고 긴 우물터가 있어 홍수가 잦았던 ‘장정들’, 때죽나무가 많았다는 ‘때죽정들’, 처음 동네가 형성되었다는 ‘원터들’, 마을 건너에 있는 ‘집건너들’, 항상 물이 많아 홍수가 잦았던 ‘수개들’, 나락 말릴 때 쓰는 당그래로 곡식을 끌어 모아 밥이 산봉우리를 이루었다는 ‘당그래봉’ 등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있는 이름들을 땅이 갖고 있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 곳 모두를 발로 밟고 다니면서 아버지와 함께 거름도 지고 날라 논밭에 뿌렸고 산에 올라 땔감도 구해오면서 자랐다.

그 중 태봉산胎封山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산 정상에 ‘王子壽堅胎室成化十九年十月十五日立’이라는 비문이 씌어진 비석이 있었는데 성화19년은 조선 성종14년(1483년)이어서 왕자 수견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이곳이 임금님의 태를 묻어둔 곳이어서 이 곳에 올라가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말대로 우리들은 그 산에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전국에 이렇게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이 많았다. 왜 하필 우리 동네에 이런 태봉산이 있어서 나무도 못하고 동네에서 먼 ‘개운골’까지 가서 땔감을 구해야 했는지 그 산에 태를 묻은 임금을 원망할 때가 많았다.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나무골’은 동네사람들이 주로 땔감을 구하러 가는 산이었다. 그런데 그 곳으로 오갈 때면 꼭 공동묘지를 지나야만 했는데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특히 산에서 나무를 하다 보면 해를 넘기기 일쑤였고 어두워지는 길을 걷다가 그 곳 공동묘지를 지날 때면 어찌나 무서웠는지 이마로 흐르는 땀은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나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무가 많은 ‘나무골’로 또 나무를 하러 갔고 나도 갔다.

‘국사봉國士峰들’은 우리 가족에게는 더욱 특별한 곳이었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국사봉 자락에 있는 ‘국사봉들’에는 몇 마지기 되지 않은 천수답이 있었다. 여섯 식구였던 우리 가족의 목숨과도 같은 밥줄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채 날이 밝기도 전에 이곳으로 나가 하루종일 땅만 파다 어두워서야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자식을 키워냈다. 지금도 그 곳 ‘국사봉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련해진다.

이제 금방 봄이 찾아올 테고 금방 온 대지가 꽃으로 물들 것이다. 모두들 산과 강으로 봄맞이를 갈 터인데 파랗게 자란 풀을 밟으며 답청踏靑이라도 하여 보자. 바로 이 땅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땅이기 때문이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