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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햇살이 좋은 날 떠난 여행의 목적지는 접경지였다. 충청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곳.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화북마을.

강경을 관통한 금강이 전라도 익산 땅을 건들고 지나는 이곳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오는 첫 번째 마을이다.

#성지순례 신도들 줄 잇는 골목길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작은 산. 금강변의 넓은 평야 가운데 있는 산이라 낮아도 눈에 쏙 들어오는데 그 산이 화산(華山)이다. 우암 송시열이 명명한 이름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들판 가운데 화산은 한 송이 꽃봉오리 같다는 그 말이 딱 맞구나 싶다.

마을 뒤로 높다랗게 성당이 보인다. 예사롭지 않다 느꼈는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화산천주교회’(사적지 제318호)다. 그 성당 아래에 화북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다. 50여 호 되는 주민 100%가 성당에 다닌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화산천주교회를 나바위성당이라고 부른다. 화산이 뻗어나간 끄트머리에 있었던 나바위(너럭바위)는 도로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일대를 나바위라 부른다 한다.

‘나바위 성지’라는 표지석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가는데 골목길로 관광버스가 지나간다.

비좁은 골목길에 웬 관광차인가 했는데, 성당 입구에서 궁금증이 풀렸다. 화산천주교회는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성지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성지순례하는 신도들이 줄을 잇는 것이다.

#“집안 일보다 성당 일이 우선이었쥬”

느닷없이 ‘대에앵∼’하는 종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종각으로 가 보니 성당 관리장인 강영구(46)씨가 줄을 잡아당겨 종을 치고 있다. 그렇게 33 차례의 종소리가 맑은 가을 속의 화북마을 위로 퍼져 나간다.

“마을에 사는 교우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걸 알리기도 하고, 가신 분이 이 종소리 속에 소천(죽어 하늘나라에 가는 것)하기를 기원하는 겁니다.”

종각 옆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한가롭기 그지없다. 가을날 늦은 오후 햇살이 마을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골목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 인근 함열에 있는 백제장례식장에서 연도(망자를 위한 천주교식 기도회)을 한단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성경이 든 가방을 들고 나선다.

“지금이사 장례식장에서 다 혀서 그렇지 옛날엔 초상칠 때면 온 동네가 들썩들썩혔어. 모두 다 성당 안에서 한 식구나 마찬가진게.”

마을 애경사뿐 아니라 성당을 건립하고 지금까지 지키고 가꾸어 온 과정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역할과 성당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집안 일보다 성당 일이 우선이었쥬, 성당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 붙였쥬.”

“그람 그람, 내 집보다 더 보살폈제.”

“김대건 순교비도 다 동네 사람들이 돌도 지고 날라다가 직접 만들었제. 나가 어렸을 때 다 봤어. 우리 부모들이 일심회라고 해서 모임이 있었거든. 그 사람들이 힘을 모았제.”

성당 사목총회장인 서철원(79)씨는 당시의 사진까지 보여 준다.

“30년 전에는 3000명이 넘었어. 근디 지금은 800명 정도밖에 안 되야. 젊은이들도 없고….”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성당에 대한 열정만은 어느 때보다 높단다. 말이야 “늙어 죽을 날 가까우니 천주님 뵐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다고 하지만, 이 곳 주민들의 삶은 성당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인 듯 싶었다.

#장독대 옆 감실 속에 성모 마리아상 모시고

마을 사람들 중에는 충청도 말을 쓰는 사람도 있고 전라도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땅이야 전라도 땅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주 생활권은 충청도 강경땅이다. 그곳으로 장을 보러 가고 막걸리를 사러 가고 짜장면을 배달하여 먹는다.

“말만 전라도 땅이제 여기는 충청도나 마찬가지여.”

“무신 말을 그러게 해유. 우리가 아무리 강경에 가서 장을 본다고 혀도 우린 엄연히 전라도 사람이 아닌가유?”

옥신각신하는데 차가 온다. 마을 사람들은 성경이 든 가방을 들고 차에 올라탄다. 몸이 불편한 사람 몇만 남고 차는 금세 떠난다.

“저러게 갈 것을 왜 그러게 아등바등 살았는가 몰라.”

“그러게 말여. 다 부질없는 세상이여. 욕심부릴 것 없어. 그저 천주님 감사합니다! 허고 살아야 혀.”

마을에서 가장 오래 성당을 다녔다는 김종배 할머니 집으로 따라 들어가 본다. 장독대 옆 돌을 쌓아 놓은 감실 속에 성모 마리아상을 모셨는데, 할머니는 그 곳을 보고 성호를 긋는다. 그렇게 문밖 출입을 할 때마다 성모님을 만난다고 한다.

#‘순례자의 길’ 끝엔 금빛 벌판 바라보는 ‘망금정(望錦亭)’

할머니가 일러 준 대로 성당 뒤편 화산 꼭대기로 이어지는 ‘순례자의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정상에는 1845년 10월12일에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첫발을 디딘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순교비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쌓아 올렸다는 순교비다. 중국에서 타고 온 돛단배의 높이와 똑같은 높이로 서 있는 순교비의 비문을 읽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비문의 문구가 가슴에 박힌다. 금빛 벌판을 바라보는 정자 ‘망금정(望錦亭)’ 안에서 성경을 펴들고 기도하는 순례자의 모습이 경건하다.

늦은 일요일 오후 빈 성당으로 들어간다. 작지만 정갈하다. 초창기 건립 당시에는 남녀를 구분할 수 있도록 칸막이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다.

아, 저 많은 성물(聖物)들을 마을 사람들이 지켜낸 것이구나. 6·25 난리통에 며칠 피난을 가면서 마을 사람들은 가장 귀한 보물인 성물을 모두 각자 집의 커다란 장독에 넣고 땅에 묻어 지켜냈다고 했다. 그런 수난을 겪고도 본디의 품위를 잃지 않은 성물들에 고개가 숙여진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하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의 세월이 켜켜이 담긴 곳. 성당을 나서니 해거름이다. 성당 앞 ‘피에타’ 아래 마을이 평안하기 이를 데 없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