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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침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다. 순창면 팔덕면을 지나는데 제법 너른 벌판이 나타난다. 멀리서 보니 마을은 강천산 자락의 낮은 동산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벌판이 펼쳐졌다. 인동 팔덕면에서는 가장 넓은 벌판이라는데 벌써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논도 있다. 하, 벌써 가을이던가. 하긴 입추가 지났으니 선들바람이 올 때도 되었구나.

팔왕(八旺)마을.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1500년 전에 마을에 설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설씨가 8명의 아들을 봤는데 모두 왕이 되어 팔왕이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똑같이 말한다. 하지만 8명의 왕은 아닐지라도 벼슬을 했던 집안인 것은 틀림없다. 지금은 설씨가 한 사람도 살지 않지만 인근 금과면에 설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하여튼 전에는 설씨 집안사람들이 벼슬을 하여 마을을 찾을 때 말에서 내리던 하마비가 마을 입구 양편에 2개가 세워져 있었다 한다. 그 중 하나는 새마을사업 하면서 쪼개 없애버렸고 하나는 현재 두 동강이 난 채 길가 풀섶에 버려져 있다. 15가구의 작은 마을인 팔왕마을은 원래 풍수상으로 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뒷산이 작은 동산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일 것이다.

마을 앞 길가에는 현재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된 잘 생긴 남근석(男根石)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2킬로 정도 가면 팔덕면 창덕리 태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미륵쟁이라고 부르는 곳에도 이와 같은 남근석이 있다. 1500년쯤에 태촌마을에 걸인이 있었는데 그 걸인이 장가를 못 가 비관하여 남근석을 깎았다고 전한다. 버려진 남근석을 청상과부가 앞치마에 싸들고 오다가 그곳 미륵쟁이에 하나 세우고 팔왕마을에 와서는 더 이상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다가 마을 앞에 세웠다고 한다.

“시집을 왔는디 요상흐게 생긴 것이 있드란 말이시?”

남근석 옆에는 팔왕마을 앞 너른 벌판을 바라보는 자리에 큰 소나무, 버드나무에 둘러싸인 모정이 서 있다. 그 모정에 할아버지 한 분이 누워 있다. 한낮의 뙤약볕을 마다 않고 고추 따러 가다가 쉰다고 했다. 할머니는 지금 낮잠중인데 깰까 싶어 몰래 나왔다는 김판암(73)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아이가 몇인가?”한다.

“예, 여식이 둘입니다.” “하이고, 그람 젊은이가 저 물을 꼭 마셔야겠구만.” “예?” “아, 저기 독바구 서 있는디 옆에 샘이 안 보인가?” “예,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요.” “맞어. 군에서 맹글었는디 저 물이 암물이여. 저기 저 마을 회관 뒤에서 나오는 물인디 아조 유명한 물인께 꼭 묵고 가드라고. 저기가 말여, 풍수상으로 여자 거시기에 해당된다고 그랴. 그래서 암샘이여.”

암물이라고 하는 곳에 가 보니 물 흐르는 소리가 맑다. 옆에 있는 남근석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어 오히려 밋밋한 감이 없지 않지만 남자가 보아도 힘있고 잘 생겼다.

“요즘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오는디 아가씨들이 꺼안고 난리여. 아들 난단께 말여! 허허!”

“영감님 자제분은” “나는 8남매여, 아들이 다섯이여, 좀 많제? 허허.” 그러면서 촌로는 고추를 따야겠다며 밀짚모자를 쓰고 지게를 챙긴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회관으로 간다. 회관에는 할머니 몇이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환타 한 병을 꺼내와 마시라 한다.

“아, 우리 동네는 자식 없어 걱정허는 사람은 없제. 나는 아들만 다섯이여. 여기는 아들이 넷, 여그도 넷. 평균이 네 명이여. 근디 요 옆 동네만 해도 아들이 없는 집안이 있어. 근디, 지비는 몇 명이여?”

팔왕마을도 어느 시골마을과 같이 아이들이 없다. 70세 아래로도 손을 꼽고 마을사람이 모두 16명뿐이다. 그 많은 자식들은 모두 도회지로 다 보내고 조용히 살고 있다.

“열여섯에 옆 동네에서 시집을 왔는디 요상흐게 생긴 것이 있드란 말이시? 시어매가 거기가서 빌라는 거여. 그렇게 해서 난 자석들인디 말여.” 가장 연로한 윤분순(85) 할머니는 연세가 어찌 되냐고 물어도 “겁나”만 연발한다. 겁나 많다는 뜻이렷다. “그래도 샘서방이 있응께로 우리 동네가 평안흐제.” 할머니는 ‘요상흐게 생긴’ 남근석을 ‘샘서방’이라고 부른다.

“회관 뒤에 가믄 샘이 있어. 글고 저쪽 파란 지붕 옆에 가믄 또 샘이 하나 있어. 거기를 ‘큰엄씨’, 여기를 ‘작은엄씨’라고 했어.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물로 밥을 해 묵어. 지비도 물통에 퍼가서 밥해 묵어봐. 틀림없어!”

“우리 둘째놈인가 낳고 나서는 말여, 동네 아무개라는 사람이 샘서방을 자빠뜨래놔부렀어. 아, 보기에 민망하다고 말여. 아, 그랬는디 작은엄씨 새암물이 벌겋게 변해 갖고 못 쓰겄드랑게. 그래서 다시 샘서방 세웠제.”

마을회관 뒤로 가니 순창면에서 샘 주변을 정화해 놓았는데 그곳에는 인정샘(人精井)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물이 너무 차고 시원하여 몇 번이고 손으로 떠먹었다.

#남자 일손 필요했던 농경사회의 기자신앙 담긴 남근석

다시 마을 앞의 모정으로 가니 서울 번호판을 단 승합차가 있다. 사내 3명이 예초기를 옆에 두고 잠시 쉬고 있다. 그들은 모두 형제인데 팔왕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갔고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하러 휴가 받아 내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난 딸만 셋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들을 셋 나섰는데 말이죠. 서울 물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맞아요. 이렇게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살아야 효험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마을 앞에 펼쳐진 벌판을 바라보며 형제는 남근석을 지나 벌판으로 나가 일을 하면서 성장한 어린 날을 회상하는 듯하다.

너른 벌판을 보고 서 있는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대표적 유적이다. 농경사회에서 남자의 일손이 많이 필요했고 많은 남자를 생산해야 했기에 민중들의 절실한 염원이 담긴 유적인 것이다. 남근석과 함께 있어 사내아이 없는 집이 없는 팔왕마을도 이제는 아이들 울음소리 그친 지 오래되었지만 여긴 여전히 그네들의 삶의 현장이다. 남근석 옆의 고추밭에서 아까부터 고추를 따는 촌로의 모습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