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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 속에 길을 나선다. 예정했던 대로 ‘불’을 찾아가는 길이다.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덩이를 안고 있는 마을이다.

북창(北倉)마을은 마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마을 주위로 분지처럼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50여 명이 살고 있어 인동에서는 제법 큰 동네이지만 북창도 다른 산골마을과 다르지 않다. 젊은이는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장마 때라 하지만 동네를 몇 차례 어슬렁거려도 마을 사람 보기가 쉽지 않다. 비를 무릅쓰고 들로 났는가, 아님 내리는 비를 피해 집안에 들었는가 모를 일이다.

#섬진강 홍수에 휩쓸려 사라진 중기사…수도승 1000여 명 넘던 대가람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암리 석등을 본다. 높이 5m가 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었는데 원래는 이 곳에 중기사(中其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중기사는 신라 중엽에 창건되었는데 당시에는 수도승이 100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1992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는 4차례에 걸쳐 2002년에 완료가 되었는데 현재는 대웅전 자리에 석축만 쌓여있고 빈터로 남아 있다.

마을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로는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절 앞에 흐르는 섬진강이 엄청난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사찰은 물론 승려 모두가 홍수에 휩쓸린 후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가로 가 보니 마침 장마 때라 그런지 물살이 제법 거세며 물줄기가 거대하다. 오랜 세월 흘러 내렸을 물줄기로 기이하게 이루어진 암벽들의 모양이 흥미롭다.

마을 뒤의 산줄기가 마을을 품어 안았다. 6·25전쟁 당시에도 인민군이 이곳을 거쳐 후퇴를 할 정도로 이곳은 산이 많지만 인동에서는 교통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북창마을이 있는 이 일대를 ‘절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절이 임진왜란 전에 있었다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기사라는 절 이름은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으로 중용을 강조했던 불경의 가르침과 맞고 이 지역이 신평면에서도 가운데에 위치한 곳으로 인식되었기에 이곳을 중기사라 명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시 우리나라를 도우러 나왔다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오히려 우리나라의 지맥을 자르는 바람에 이 일대에 가득했던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끊어지고 모두 폐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검은 소가 나와 북을 치면서 피를 흘리며 산을 넘어 갔다고하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폐찰 일으키고 석등에 불을 밝힌 ‘땀보중’

하지만 옛 영화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 박주봉(마을주민 신상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박학송이라고도 부른다)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땀보중’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는 폐찰이 된 중기사에 작은 초막을 짓고 사다리 놓고 올라가 석등에 불을 밝히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던 힘든 시절의 얘기인데 땀보중의 기도는 하늘도 감동시켰는지 밤이면 호랑이가 와서 그를 지켜주었고 마을은 평화로웠다고 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땀보중을 기특하게 여겨 그를 위해 작은 집 한 채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기사터는 박용만이라는 지역유지 소유의 땅이었는데 흔쾌히 땅을 희사하였던 것이다. 절을 복원하기로 지역유지들이 ‘절계’를 조직했을 정도로 절은 폐허가 되었어도 불심은 오히려 불꽃처럼 살아났던 것이다.

이때 마을 앞 섬진강가에서 찾은 철불과 함께 30여 미터 서쪽에서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수습하여 작으나마 중기사가 세워져 다시 독경소리 울리고 석등에 불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하여 북창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절로 찾아가 철불과 석조비로자나불과 석등의 불빛으로 힘을 얻었던 것이다.

인근 초등학교들은 봄 가을 소풍으로 당연히 이곳을 찾아들었고, 마을 사람들도 먹고사느라고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지만 초파일이면 몸단장하고 찾아가 마을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복을 위해 연등 하나 걸고 두손 모아 불밝힌 석등을 돌았던 것이다.

그런데 땀보중이라고 불렀던 박주봉이 죽고 나서 중기사는 커다란 변화를 치르게 된다. 철불과 석조비로자나불상이 부서지고 버려진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수습이 되었을 때는 이미 불상들은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었다. 철불은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목이 잘려 있었다.

현재 중기사 복원을 위한 종합발굴조사 때문에 옮긴 임시콘테이터박스 법당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잘생긴 청년 모습 철불이 팔이 잘려 애처롭고, 목이 잘린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임시로 붙여놓은 것이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것 같아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문화재 석등’ 가까이 사는 어려움

이후 초파일이 되어도 마을 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지지 않았고 연등과 석등은 불을 밝히지 못했다.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 마을을 지켜주었고 마을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던 불상이었지만 조각조각 상처가 나고 보니 마을 사람들로서는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현재 마을 사람들은 전국에서 가장 큰 석등이 있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생활에 적잖은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석등 인근에 사는 광주댁 아주머니는 더욱 그렇다.

목숨처럼 애기중지하며 가꾸었던 땅이 알고 보니 옛날 절이었고 임실군에서는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한다 해서 싼 가격으로 팔 수밖에 없었다. 92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로 인해 비오는 날이면 토사가 집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물난리를 겪어야 했고 포크레인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집안에 있을 수가 없었으니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당연하겠다.

“지금은 중도 아닌 사람이 목탁 두드리고 있어. 그러니 누가 절이라고 가서 빌고 싶겄소. 예전에 공드리던 불상도 쪼각쪼각 나부렀는디 누가 공을 드리고 싶겄냔 말이오.” 현재 중기사는 보살이라는 아주머니 혼자 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주머니 집에 가장 많은 중지사의 석조물들이 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1996년에 새로 지었다는 집 기초를 이 석조물을 넣어 다졌다는 것. 그래서인지 3남 2녀의 자식들 중에서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아이들이 몇 있다며 어떻든 절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는 공과 부처님에게 들였던 공이 발복을 하는가 보다며 웃는다.

중기사터에서는 2002년도에 끝난 발굴조사시 ‘眞’자와 ‘丘’가 명문된 기와가 발견되었다. ‘진구사’라는 사찰을 자복사로 정했다는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에 1407년(태종 7년) 여러 고을에 복을 비는 자복사로 정했다는 기록이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 때까지는 사찰이 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빗속에 마을을 배경으로 석등이 우람하게 서 있다. 그 웅장함이 압권인데 한번 불을 밝히면 한양 남대문을 너머 중국 황실까지 비쳤다 한다. 중기사라는 절 이름처럼 이곳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얘기들이다. 예전처럼 석등에 불 밝히고 마을 사람들 마음 그 불빛으로 환한 태평성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