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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광(澄光)마을을 찾아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니까 10여년 전, 처음 이곳 징광마을을 찾을 때는 겨울이었다. 벌교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징광마을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땔감나무를 지고 내려오는 촌로가 아니었으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으로 생각하고 되돌아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터벅터벅, 촌로 말대로 산모롱이를 서너 번 돌아가니 그 깊은 산골에 마을이 있었다. 그런 곳에 마을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을은 존제산 자락(≪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화산(金華山)이라 기록)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에 조용히 들어앉아 있었다.

#‘징광사’ 흔적 전하는 돌거북

다시 징광마을을 찾아갈 때는 가랑비가 흩날리던 날이었다. 수목으로 가득한 금화산(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부른다) 자락은 온통 신록의 물결, 왼편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흘러내리는 계곡물소리가 우렁차다.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마을진입로는 여전히 좁다. 그렇게 몇 번 산모롱이를 돌아 다시 만난 마을엔 모내기를 끝낸 계단식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먼저 마을 뒤에 있는 징광사지로 간다. 이 마을을 몇 번이고 찾는 이유는 이곳 징광사지 때문이다. 현재 징광사지에는 천년의 세월 동안 이 터를 지키며 절집의 흔적을 말없이 전하고 있는 석물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비(碑)는 없어졌고 비를 이고 있던 귀부와 이수만이 빈터를 지키고 있다.

비는 어느 문중에서 묘비로 사용하기 위해 비문을 깎아버렸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고려시대 사찰인 징광사가 1680년께 폐찰이 된 후 문화유씨(文化柳氏)가 입촌하면서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절 이름을 따서 징광이라 했다.

“지금 마을과 논들은 옛날에는 다 절이었을 것이여. 절이 망하고 사람들이 한둘씩 모여들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것제. 긍께 우리 동네는 절동네여.”

흩날리는 비를 피할 겸 들어간 집 주인장인 박화일씨가 마을 내력을 소상히 얘기한다. 뜻하지 않게 마을의 역사를 잘 아는 분을 만난 것이다.

“내 평생 여기에서 나고 살았어도 거기에 그런 비석이 있다는 것도 몰르고 살았구만이라.” 옆에 있던 그이 부인이 거든다. 우리네 부모들이 다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삶이 전쟁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먹고사는 것 외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마을 뒤 10만여 평 야생차밭에선 ‘징광차’

“저 위에 있는 큰 집은 한창훈씨 댁인가요?” “아니, 한창훈을 어뜨케 알아요?”

한창훈은 1976년 3월에 기존의 잡지하고 다른 한국적인 것, 민중적인 것을 기조로 창간되었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의 동생이다. 인근 고읍리에 있는 지곡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세상을 뜰 때까지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았던 그와 박화일씨는 친구였다 한다. 7년 전 세상을 뜬 한창훈씨가 정비했다는 마을 뒤 절터는 새 세상을 위한 준비를 하듯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징광마을이 알려진 것은 일명 ‘징광차’ 때문이기도 하다. 마을 뒤 10만여 평의 야산에 조성되어 있는 야생차밭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야생차밭에 속한다. 금화산과 제석산 자락의 깊은 골에서 신령스러움을 간직한 안개비를 머금으며 자라는 야생차는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 한다.

“다른 데서 나온 차하고는 째비도 안되아. 여기는 완전히 야생이랑께.”

“혹시 직접 차를 덖어드시기도 하나요?”

“그람요. 그냥 보리차 끓이듯이 해서 마셔요.” “여보, 손님 오셨으니까, 한번 맛 좀 보여주지.”

아주머니는 ‘뭐 그런 것을’하는 표정으로 일어나 부엌에서 작은 쟁반에 컵을 가져 나온다. 그리고 방에서 달력 찢은 종이에 싼 차를 내온다.

“아홉 번을 덖는다고 하는디 우리는 그냥 맹그러요.”

차향이 너무 신선하여 오랫동안 차를 코끝에 댔다. 아직까지 이렇게 신선한 차향을 맡은 적이 없다. 물 끓인 주전자를 가져오자 박씨는 큰 사기대접에 물을 붓는다.

“자, 마셔 봐요. 우린 찻잔도 없소.”

대접에서 우린 찻물을 컵에 따라 주었다. 차맛은 내가 지금까지 마신 차 중에서 가장 맛난 것이었다. 어떤 형식도 따지지 않고 그처럼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고급화되는 징광마을 문화 아쉬워

마을 아래에, 그러니까 징광마을을 찾아 산 아래에서 올라올 때 처음 만나는 집이 있다. 그 집이 유명한 징광옹기를 굽는 곳이다. 한창훈씨의 부인과 그의 처남이 운영한다는 가마인데 이미 오래 전에 《뿌리깊은 나무》에서 자주 접한 옹기였다.

시골 우리집 뒤안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커다란 옹기 같은 것.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작은 집과 작업실, 그리고 옹색한 가마가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대단위 조경공사를 하고 있다. 앞 마당에는 징광사지에서 나온 부도와 배례석, 탑 옥개석 등으로 조경을 해 놓고 큰 연못도 만들었다. 작업실에 들어가니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에 나오는 듯 어르신 한 분이 흙물을 거르고 있다.

잠깐 마루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은 아저씨끼리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얼마 전에 스님이 여기 차를 마셔보더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차라고 했어. 그러면서 가격이 너무 싸니 더 올리라고 하더라니까.”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민중적인 것을 찾아 보급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징광마을의 문화가 고급화되고 있다. 보통사람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싼 징광옹기, 징광차는 이미 민중적이지 않는 것 같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열 두 암자가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지만 그 영화도 지는 꽃처럼 시들었다. 선암사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징광사 명물 수박다리(홍예다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장맛비에 휩쓸려가 흔적도 없고 전설만 떠돌 뿐. 폐허 위에 세운 마을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데 이곳 징광사지의 돌거북과 이수를 보면서 뜬구름 같은 세상사의 끝자락을 붙들기 위한 안간힘이 부끄럽기만 할 뿐이고, 가랑비 나리는 날씨 속에서도 논둑에 풀 베러 간다는 박화일씨와 아주머니를 보면서 삶의 경건성과 진정성을 확인하면서 고개가 숙여진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