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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끼고 있는 그곳에도 산골마을은 있었다. 영광읍을 막 지나 고창으로 나가는 길목. 제법 넓은 들판이 있었고 그 들판을 가로질러 서울로 가는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목 오른편 들판 가운데에 조각난 돌당간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밖에 없는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옆 도로 건너편엔 탑 1기가 쓰러질 듯 서 있다. 월평탑이라 한다. 영광읍 월평리(月坪里) 월평(月坪)마을에 있는 탑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월평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그곳에 작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당간과 탑이 그나마 옛날엔 목탁소리, 경 읽는 소리가 이 들판 위에 울려 펴졌음을 어렴풋이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농가 옆 우거진 잡초 너머 작은 월평탑

몇 해 전 이 탑과 당간을 처음 보았을 때 들판 가운데 농가 옆에 서 있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보는 그 모습도 여전하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기만 하다. 작은 월평탑과 더 없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슬레이트 지붕의 담장 없는 작은 민가도 여전해서 더욱 반갑다.

하지만 집안을 들여다보니 사람 떠난 빈집. 잠시 텅 빈집의 빈 마루에 앉아 몇 자 단상을 끄적인다. 우거진 잡초 너머로 월평탑만 여전하다. 하긴 그렇게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을 터. 변하는 건 사람뿐일 것이다.

제법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는 월평마을은 말 그대로 마을의 형국이 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벌판을 바라보고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는 월평마을은 그나마 지금까지 찾았던 산골마을들보다 조금은 넉넉해 보인다. 마을 앞의 넓은 평야가 마을을 먹여 살리는 목숨줄일 것. 들판은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70여 호 되는 제법 큰 동네이지만 마을로 들어서서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가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담장을 기웃거려도 마찬가지다. 마을 안쪽에 제법 큰 제각도 보인다. 영광김씨(靈光金氏) 시조(始祖) 김심언(金審言)이 태어난 곳으로 문중 제각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제각 정문 앞에 제각과 대조되는 작은 민가가 있다. 밖에서도 집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담장이 낮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집안으로 들어가 기웃거려도 인기척이 없다. 마당가 텃밭에는 마늘이 성기게 자라고 있다. 마루에 잠깐 앉아 있다.

나서려는 발길을 “누구요”하는 목소리가 잡는다. 돌아보니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고개를 내민다. 할머니는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하며 손뼉까지 칠 기세다

“쟁일 모 심고 나믄 손가락이 퉁퉁 부어”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어요?”

“어여 들어와.” “식사중이셨군요.” “응, 약초 뿌랭이 좀 캐왔다가 늦었어.”

오후 4시도 넘은 늦은 점심을 먹는 할머니는 약초 다린 물이라며 한 컵 내놓는다.

“이 떡도 한 점 해봐. 우리 딸네가 해 온 떡인디 맛나.”

“아하, 오늘이 어버이날이라고 할머니 따님이 오셨던가 봐요. 이 카네이션도 사오셨나봐요?”

“응, 읍네에 사는 딸인디 아칙(아침)에 사우(사위)랑 와서 달아 준 거여.”

“왜, 그대로 달고 계시지 않구요.”

“달아봐야 뭐, 일흐는디 귀찮기만 허제. 저 꽃은 벌써 몇 년 되았어.”

냉장고 문에 붙여 놓은 빛바랜 작은 카네이션은 손주들이 사 준 것인데 몇 해째 두고 있다.

“나가 어뜨케 자석들을 키웠간디. 나가 고구마 한 개 묵을 때 자석들은 두 개 세 개씩을 믹이문서(먹이면서) 키웠는디…”

할머니는 주섬주섬 얘기를 꺼내 놓는다. 24년 전에 영감님을 먼저 보내고 혼자 6남매를 모두 잘 키워 시집 장가 보냈단다.

“우리 영감하고 나하고 12년을 소작했어. 우리 땅이 없응께. 진짜 죽을 동 살 동 일만 했제. 그 때 생각흐믄 이가 갈려. 징글징글허게 살았제.”

그렇게 돈을 모아 논 18마지기를 마련하고 직접 농지정리도 했다.

“지금이야 기계가 농지정리 다해도 그때는 어디 그랬간디, 나가 다 해야제. 어후 말도 마.”

할머니 손가락이 온전한 게 없다.

“하루쟁일(종일) 모 심고 나믄 손가락이 이렇게 퉁퉁 부어. 그래도 헐 수 없어. 또 가서 모 심어야제. 그렁게 손가락이 요 몬양이여.”

손금도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손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인잔 모다 내 놔 부렀어. 붙여 먹을 힘도 없는디, 갖고 있어봐야 뭔 소양(소용)이 있겄어 ….”

▶월평떡의 카네이션

월평리가 친정인 월평떡 할머니는 아직까지 다른 곳으로 떠나 본 적이 없었는데 촉이 나간 안방전구 하나 바꿔 끼울 힘이 없어 보름 동안을 부엌에 켜 놓은 불로 살면서 대처로 나간 자식들한테 가서 살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동네에서 가는 여행도 빠지지 말고 가서 재미있게 놀다 오시고 그러세요.”

“저번에도 동네에서 이만원씩 걷어갖고 완도 놀러갔다 왔어. 와따마, 거 영화 촬영장인가 허는디는 굉장하등마. 그그서 맛난 것도 묵고 그랬제.” “잘 하셨네요.”

“일주일 동안 중국도 갔다 왔어!” “중국까지요? 많이 다니셨네요. 할머니.”

“백두산도 갔어. 다른 사람들은 꼭대기에서 물 구경을 못했다고 흐든디, 나는 봤어. 굉장흐등마.”

“할머니가 착한 사람인가 봐요. 그 천지는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가 할머니 같이 착한 사람한테만 얼근 보여주고는 또 금방 가려 버린데요.” “에이.”

피시 웃으며 손사래를 흔드는 할머니의 웃는 모양이 곱다.

“나가 공부헌 것은 왜정 때 아홉 살, 열 살 때 배운 것이 전부여. 그래도 난 은행가서 카드 넣고 돈 찾을 때 비밀번호 누르라고 흐믄 눌러. 다른 사람들은 못 누른다고 허는디 말여.”

할머니의 목소리가 신났다.

“근디, 뭘 그리 적어싸. 나 잡아 갈라고 그랴? 나 잘못흔 것도 없는디?”

할머니한테 사진 한 장 찍어 주십사 청을 한다. 할머니는 읍내 사는 딸이 사준 카네이션을 꽂고 밖으로 나온다.

“사진까지 찍고 진짜 날 잡아 갈란갑네.”

작은 수돗가엔 흰색 붉은색 철쭉이 한창이다. 철쭉 사이에 앉은 할머니가 웃는다. 가슴에 꽂은 케네이션을 확인하듯 만진다.

“다음에 또 놀러와.”

할머니는 내 얼굴까지 쓰다듬는다. 까칠한 손길에 담긴 정이 보드랍다.

골목에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에 할머니가 먼저 대문을 나선다. 마을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한데 모아진다.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 영광김씨 제각이 그 중 눈에 띈다. 할머니의 작은 집이 보인다. 그새 집에 들어간 할머니가 텃밭 마늘밭에서 마늘쫑을 뽑고 있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