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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산도 많고 깊다. 남도 땅 화순에 이렇게 많은 산이 있었다니. 알고 보니 화순 땅의 74%가 산으로 이루어졌단다.

그 산속,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쌍봉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이양면 증리 계당산 자락은 쌍봉 철감선사 박도윤이 개창한 쌍봉사가 있는 곳이다. 철감선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상사에 기억되는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영월 법흥사)을 개창한 징효 스님(생전에는 ‘절중’이라 불렀으나 열반하신 후에 시호를 ‘징효’라 했다)의 스승이기도 하다.

#시루 속 들어앉은 것 마냥 평온한 마을

쌍봉사로 가는 길은 길고 구불구불하다. 그 외길을 따라 가다 자가용 한 대 간신히 드나들 낡은 시멘트 포장길이 나온다. 지금은 초록이 짙어 그 작은 길마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숲길을 따라 한참으로 올라가다보면 아니,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갑자기 확 트이는 시야와 눈앞에 펼쳐지는 천수답과 그 논 위에 구름처럼 앉아 있는 집들이 있다. 여기가 화순군 이양면 증리 증동마을이다.

마을 사람이래야 모두 8명뿐이고 집이라곤 4가구뿐인 증동은 화순군에 있는 마을 중 오지 중에서도 오지이다.

대나무 숲을 뒤로하고 들어앉은 증동마을은 참으로 평온하고 아름답다. 오래도록 앉아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은 마을이다. 증동(甑洞)이라는 말대로 시루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평온하기만 하다.

이런 증동마을이 요즘 외부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산 속의 오지마을이 아니라 우리나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의병촌’으로 그 얼굴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삼천리 방방곡곡 그 어느 곳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때 일어서지 않은 곳이 있었겠는가마는 유난히 이곳 증동마을이 의병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의병 관련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 의병의 특성상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는 상황인데 이 이곳 증동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의병 유적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라남도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된 이 곳의 정식 문화재 명칭은 ‘쌍산의소(雙山義所)’다.

한말시대에 이곳 증동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쌍산의소’ 부대라고 하는데 이 의병부대의 부대장이 이곳 증동에서 가까운 이양면 쌍봉리 출신으로 행사(杏史) 양회일(梁會一, 1856~1908)이라는 분이다. 이 분이 남긴 문집인 《행사실기(杏史實紀)》의 <…이곳은 쌍산(쌍봉)이 있는 의로운 곳이니…>라는 문구에서 그대로 명칭을 따온 것이다.

#의병 유적 고스란히 남은 ‘의병촌’

특히나 이곳 증동마을은 양회일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을 모아서 처음으로 창의(倡義)를 모의한 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군량미를 모았는데 그 군량미를 쌓았던 터도 남아 있다.

그리고 화약을 만들기 위해 캤던 유황굴이 있으며 인근 보성의 철광산에서 가져온 광석을 녹여 총포를 제작하던 대장간터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원석을 녹일 때 나온 쇠부스러기들이 쌓여 있는데 그것을 보면 치열했던 구국운동의 한 면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마을 뒤편 산자락을 넘어 가면 왕피동이라는 곳에 의병성이 있다. ‘왕피동’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이 난을 피해 피신을 올 정도로 깊은 산골인데 이곳에서 쌍산의소 부대원들이 모여 훈련을 받고 이곳에서 출병식을 하고 1907년 3월9일에 당시 능주면소재지에 있던 군아와 왜헌병분파소 및 세무소를 습격하여 양총 5정, 군도 3자루, 총탄 700여 발을 노획하기도 한다. 또한 1907년 3월11일에는 동복면소재지에 있는 동복관아와 왜헌병분파소를 습격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활동은 산이 많은 이곳 계당산의 지형을 적극 활용한 경우다. 주민들 중에 최근에 작고하신 분은 아직 단 한번도 이곳 증동 일대를 나간 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아마도 산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바깥사람이 바라보는 편견으로는 평범치 않은 그들의 삶이 신령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초라한 농투성이의 모습이지만 감히 범접치 못할 삶이다.

자료에 의하면 증동마을은 1820년 말에 천안 전씨가 입향하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마을사람들에게 마을의 내력을 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이도 나이지만 말 그대로 농투성이로 살아온 그들인지라 글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원래는 4가구에 8명이 사는데 한 명이 오늘 광주에 있는 병원에 간다고 아침에 나서더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순박한 그들은 사진을 찍는다니 군말 없이 나서서 차렷자세를 취한다. 4가구 외의 빈집들은 거의 주저앉았고 쌍산의소 최초 창의모의소는 지난 태풍에 무너져 내리는 등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화순군에서는 최초 의병창의 모의소를 매입하여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의병모의소가 완공되면 몇 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관리를 하면서 이곳을 찾는 일반인들의 나라사랑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왕이 피난왔다는 ‘왕피동’엔 의병성도 남아

그 중 가장 연장자이며 양회일 장군의 조카 손자로 알려진 양동채(78) 옹은 증동이 의병촌으로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양장군’(이곳 사람들은 쌍산의소 의병군의 양회일 의병장을 양장군이라 부른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거의 사람 발길이 없는 외진 마을이지만 요즘 마을을 드나드는 발길이 부쩍 많아졌다. 최초 의병모의장소를 복원하기 위한 공사때문이다.

“몇 사람 살진 않아도 여기는 자랑스런 곳이여! 이런 곳이 없어!”

양회일 의병장 조카 손자인 양 옹의 당찬 목소리에는 꼿꼿한 기상인 가득하다.

마을 뒤 너럭바위에 쌍산의소 부대의 참모였던 박종일(朴重一) 의병의 손자이며 광주에서 서예원을 운영한다는 박경래라는 분이 1995년에 각자했다는 ‘雙山義兵村’이 선명하듯이 이 작은 증동마을의 역사는 세월이 지나도 선명하리라.

마을 가운데 군량미를 쌓았던 곳 바로 아래에 옹달샘이 있다. 왕피동에 의병성을 쌓던 이름 없는 증동사람들이 돌을 져 나를 때 그 메마른 목을 축여줬을 옹달샘은 지금도 그 날의 의기처럼 평평 솟아나고 있다. 마을에 있는 낡은 문화재 안내판의 희미해진 글귀는 퇴락하였지만, 증동의 의병 정신은 더욱 되살아날 것임을 본다.

허나 지금 남은 사람들조차 이 마을을 뜨고 나면 그 누가 이 곳을 지킬까 쓸데없는 걱정을 잠시 해보게도 된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