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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만 가는 가을 하늘을 이고 찾아간 곳은 장성군 황룡강변이다.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변에는 어디나 그렇듯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황룡면 황룡리 일대는 장성군의 곡창지대인 황룡강변 넓은 벌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마치 계란 노른자위처럼 가운데 산 속에 들어앉은 곳이 황룡리이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농로인지라 찾아가기 쉽지 않은데 그렇게 구불구불 여러 마을 앞의 황금들판을 지나 달리다보면 황룡강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이 있다. 그 원앙마을은 낮은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금실 좋은 부부의 대명사인 원앙이 황룡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형국이라 하여 원앙마을이다.

특히 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잡은 전라남도 기념물인 요월정(邀月亭) 원림(園林)이 마을을 빛내주고 있는데 정자에 올라 동편에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동네이니 참으로 운치 있고 멋드러진 동네이기도 하다.

#마들 뒷산엔 달맞이 하는 요월정

“나가 그런 것을 어치게 알겄소? 일흐니라고 바쁜께 쪼깨 비켜줏시오.”

길가 공터에 널어놓은 콩을 까불고 있던 할머니한테 요월정을 물었다가 퉁박을 듣는다. 하긴 한줌 햇살이 아까운 요즘 농촌 들판이 아닌가. 이런 판국에 요월정에 놀러가 봤냐는 한가한 질문이나 던지고 있으니 핀잔 들어도 싸겠다 싶다. 할머니는 작대기를 휘둘러 콩깍지를 두드린다.

할머니와 함께 작업중인 막내며느리의 작대기를 들고 콩깍지를 두드려 보았다. 바싹 마른 콩깍지에서 우둑우둑 노란 콩들이 쏟아져 내린다.

“허기는 보름달 뜰 때믄 간혹 심심풀이로 올라가 보긴 흐제. 그때 보믄 진짜 좋긴 합디다. 지난 봄에도 동네 사람들이 모다 거기서 화전놀이 했어.”

요월정 원림에는 100여 그루 배롱나무가 정자 주변을 감싸듯 서 있는데 자미꽃이 흐드러질 때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싶은 곳이다.

“꽃이 필 때믄 어떻게 알고 오는지 사람들이 솔찬히 찾아오긴 헙디다마는 요즘 같은 때는 암도 안 오요. 누가 이런 딜 역부러 올라고 허겄소.”

옆에서 함께 콩 까는 일을 하던 영감님과 막내며느리는 말도 없이 작대기질만 하고 있다.

“아야, 집에 가서 봉지 좀 가져 오니라. 이 냥반 좀 담아주자.”

할머니가 지나가는 바람에 쏟아진 콩들을 한쪽으로 모은다. 며느리가 집에 가서 까만 비닐봉투를 가져다 주니 할머니는 추린 좋은 콩들을 쓸어 담는다.

“갖고 가서 비린내가 안 날 정도만 삶아. 그래 갖고 믹서에다 갈아놨다가 아칙에 일흐러 나갈 때 한 그릇씩 마시고 나가. 우유보다 더 좋은 것이 요거여.”

#“할머니 성격이 화끈하신가 봐요.”

“남자들도 날 못해 보요. 난 아싸리흔 사람이여.…아야, 가서 저 감도 따다 드리거라 잉.”

“우리 어머닌 남한테 주길 좋아하는 분이에요.”

처음으로 말문을 여는 며느리는 벌써 밭에서 주먹만한 단감 몇 알을 가져온다.

미안함에 작대기를 내려놓고 계속 뒷걸음질을 친다.

“줄 때 받으시오. 우리 동네에서 그 사람 것 공짜로 안 받은 사람이 없은께.”

옆에서 보고 있던 동네 할머니가 거든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해서 내보냈다고 한다. 그 중에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을 집에서 딸처럼 키워 시집까지 보냈다는 것이다.

#“된장 쒀서 노인들 밥해줄라고 콩 심으요”

게다가 할머니는 지나가는 노인들만 봐도 그냥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집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고 먹여서 보낸다고 한다. 어떤 노인들은 몇 달씩 할머니 집에서 기거하다 간 적도 있다.

“돈이 드는 것은 아니여. 밭에서 나는 호박 있겄다, 배추 나겄다, 고추 나겄다, 뭐 돈 들일이 아녀. 근디 쌀은 좀 듭디다. 쌀이나 누가 좀 줬으면 좋겄드마.”

“효부상이라도 동네에서 추천해야겠네요.”

“효부상은 나도 진작에 따 봤어. 강진에서 막 결혼해 갖고 시부모 매시고 사는디 헌다고 했제. 시골서 바깥일이 좀 많애? 그래도 때가 되믄 뜨뜻흔 밥 해 갖고 시부모를 챙겼제. 글고 나서 또 일 흐로 들에 나가. 그렇게 깜깜해 갖고도 일을 했어. 뭔 일이 그렇게도 많앴는지 몰라. 말년에는 시부모가 모두 망령이 났는디.

그래도 부몬디 어쩔 것이여. 똥오줌 다 받았제. 그걸 동네 이장이 봤는갑서. 그래 갖고 상을 받았어. 10만원하고, 스댕 밥그릇 한 세트를 받았는디, 그때 돈으로 10만원 허면 굉장히 큰돈이었어. 자랑헐 것도 못되고 했는디 자석덜이 간혹 상장을 보자고 헌디.

그런 종우때기를 언제 챙기고 했겄어. 살기 바쁜디. 지금도 일년에 한번이믄 장흥 관산에 있는 시부모 뫼를 찾아가요. 근디 40년 전에 죽은 그 시부모가 꿈에 현몽을 흐믄 꼭 좋은 일이 생긴다 말요. 돈 다발이 들어온다든지 아들들이 승진헌다든지 그요.”

#“그것이 다 자네가 공을 들인께 복을 받는 것이여!”

가실 배추를 다듬던 다른 할머니 한 분이 보탠다.

“이름은 허접쓰레기 같은 것인께, 적지 말고”

“나가 콩을 뭘라고 심은지 아요? 된장 쒀서 노인네들 밥해 줄라고 그요. 요즘 젊은것들은 친부모도 잘 안 모실라고 그래. 그래서야 쓰겄어? 암튼 복 받을라믄 지 부모를 잘 섬게야써.”

할머니 함자를 적겠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웃기만 한다.

“그건 허접쓰레기 같은 것인께, 소용이 없는 것이제.”

“우리도 요 할마씨 이름을 모르요. 그냥 강진떡이라고 그래.”

하긴 굳이 이름 석자 기어이 넣겠다는 생각이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겠다.

마을을 둘러볼 양으로 골목길을 지나는데 집집마다 텅 비어 있다. 원래 60여 가구 되는데 그나마 빈집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가실 때라 죄다 들에 나가고 마을은 텅 비어 있다. 마을 앞에 당산으로 다시 나오니 당산아래에 동네 할머니 몇 분이 모여 있다. 강진 할머니도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가을배추를 다듬고 있다.

#“한 주먹 뽑아 줄랑게 가져 갈라요?”

당장에 밭으로 달려 갈 것처럼 할머니가 일어선다. 간신히 말려 사진 한 컷 찍겠다 하니 앞에 있던 배추 바구니도 옆으로 치우고 머리 수건도 벗어 쓰다듬고 포즈를 취한다. 늦은 오후의 잔 햇살이 할머니 머리에서 부서지는데 슬쩍 눈이 부신다.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